3천년 전에 쓰인 이야기를 오늘 날까지 흡입력 있게 읽어내게 만드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오디세이아'는 그 질문에 나름의 답을 낸 책이라고 생각한다.
원전은 오디세우스의 귀향이 임박한 시점에서 시작해, 그의 10년 간의 여정을 회상 형식으로 되짚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아우구스테 레히너는 이 구조를 과감히 풀어, 트로이 전쟁 직후부터 사건을 시간 순으로 다시 배열했다. 이 판본이 방대한 서사시라기보다 한 편의 장편 소설처럼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4권에 달하는 고대 서사시를 처음부터 완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레히너는 그 방대한 원전을 손상 없이 압축하면서도, 독자의 이야기가 흐름을 잃지 않도록 세심하게 다시 짜냈다.
폴리페모스의 동굴로부터의 탈출. 세이렌의 노래. 스킬라의 카립디스 사이를 지나는 항해까지, 사건 하나하나를 독자는 자유롭게 상상해나갈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 이 이야기에 관해 말한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에게 놀란의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아테네 여신이 오디세우스가 전장에서 끝내 구하지 못한 한 여인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놀란은 오디세우스의 10년 방랑을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전쟁의 잔혹함과 가족을 버려두었다는 한 인물의 죄의식으로 재해석한다.
7년이나 그를 붙잡아 둔 '칼립소'가 그리스어로 감추다, 숨기다를 뜻한다는 사실이 그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갓난 아들과 아내를 등지고 떠났던 사람이, 죄의식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스스로를 세상 밖에 숨겨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우구스테 레히너의 '오디세이아'는 죄의식을 굳이 언어화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아테네의 도움으로 노인의 모습으로 변장해 왕궁에 잠입하는 장면 역시, 원전에서는 구혼자들을 속이기 위한 실용적인 전략으로 그려진다.
필자가 느꼈을 때는, 이 담백함이야말로 오디세이아라는 이야기가 3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여전히 살아남은 힘일 것이다. 설명하지 않기에, 원전은 매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다시 쓰일 자리를 내어준다.
놀란의 영화가 그 여백에 그려 넣은 죄의식의 서사도, 그런 점에서 이 오래된 이야기와 오늘날의 관객을 잇는 진지한 대화가 될 수 있었다.
원전과 영화. 어느 쪽이 정말 진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그 빈틈이야 말로 하나의 신화가 계속해서 다시 쓰이는 이유라는 것이다. 레히너의 '오디세이아'는 설명하려 들지 않기에, 독자를 포함한 후대의 창작자들이 각자의 답을 채워 넣을 자리를 내어준다.
이 신화가 결국 건네는 말은 단 한 번 뿐인 유한한 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 그럼에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겠다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불사의 삶을 제안 받고도 거절하고, 이리저리를 방황하다 20년 만에 낡은 몰골로 고향 땅을 밟아야 했던 이유. 그것은 오디세우스가 결국 그의 몫으로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 끝내 마주하러 돌아왔기 때문이다.
방랑이나 여행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돌아갈 곳이 있기에 존재한다.
오래 전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를 붙드는 이유는 결함 투성이인 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기 위해 다시 닻을 올리는 그 미련한 용기가 시대를 초월해 유효하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