ἄνδρα μοι ἔννεπε, μοῦσα, πολύτροπον, ὃς μάλα πολλὰ πλάγχθη, ἐπεὶ Τροίης ἱερὸν πτολίεθρον ἔπερσεν·
"들려주소서, 무사(Musa) 여신이여! 트로이의 신성한 성채를 무너뜨리고 그토록 오래 방황했던, 지혜롭고 수완 좋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 《오디세이아》의 첫 구절
들어가기 전에 잠깐, <오디세이>와 《오디세이아》는 뭐가 다를까?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소소한 상식 하나. 요즘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제목은 <오디세이(Odyssey)>이고, 원작 서사시의 이름은 《오디세이아(Odysseia)》다.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오디세이아(Odysseia)는 고대 그리스어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또는 노래)'라는 뜻이다. 주인공 오디세우스 이름 뒤에 접미사 '-ia'가 붙어 만들어진 원작 고전의 본래 명칭이다. 그리고 오디세이(Odyssey)는 '오디세이아'가 영어식 발음과 표기로 정착한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단순한 작품명을 넘어 '긴 모험', '뜻밖의 고난이 가득한 장대한 여정'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즉, 영화 <오디세이>는 고전 《오디세이아》라는 거대한 뿌리에서 출발한 현대적 여정인 셈이다.
지금 세계는 한 남자의 여정에 열광하고 있다. 개봉 이후 극찬 세례 속에 글로벌 흥행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는 영화 <오디세이> 이야기다. IMAX를 통해 신화적 세계관을 압도적으로 재현해 낸 영화의 성취도 놀랍지만, 그 원류인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이미 기원전 8세기부터 수천 년간 인류의 사랑을 받아온 거대한 원형이다. 서양 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원류로 꼽히는 이 이야기는 오늘날 수많은 영화, 소설, 드라마 속에 오마주와 이스터 에그로 숨쉬고 있으며, 시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학자와 작가들에 의해 재해석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 무수한 번역본과 각색작 속에서 왜 아우구스테 레히너가 풀어지은 《오디세이아》를 읽어야 할까? 단순히 "이 책만 보라"는 뜻이 아니다. 레히너의 텍스트를 정교한 지도 삼아 오디세이아의 거대한 서사를 한눈에 이해하고, 그 속에서 나만의 오디세우스를 정의하며 진정한 '여정(Odyssey)'을 떠나보길 권하기 때문이다. 레히너의 책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A Fleet : 길을 잃지 않는 명쾌하고 직관적인 항해
오랜 세월을 거친 만큼 《오디세이아》는 다양한 번역가와 작가의 손을 거쳤다. 그중에서도 레히너의 책이 돋보이는 이유는 서사 구조의 명쾌함이다.
호메로스의 원작과 놀란의 영화는 시점이 교차하고 수많은 교차 편집이 동반되는 비선형적(Non-linear) 구조를 취한다. 처음 입문하는 독자에게는 인물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과거 이야기가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반면 레히너의 책은 모든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재구성하고 3인칭 관점을 유지하여, 독자가 오디세우스 일행의 모험을 한 편의 정갈한 서사시처럼 차분히 추적할 수 있게 돕는다.
특히 원작 총 24편 중 초반 5편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진입장벽을 형성하지만, 레히너의 책은 트로이 전쟁 직후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귀향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직진한다. 덕분에 독자는 서사의 중심인 오디세우스 본인의 발자취에 온전히 몰입하여 항해를 시작할 수 있다.
2. A Man : 시련마저도 살아 숨 쉬는, 입체적인 존재들의 대서사
고대 신화의 세계답게 오디세우스의 길목에는 다채로운 존재들이 등장한다. 식인 거인이자 포세이돈의 아들 폴리페모스, 동료들을 돼지로 바꿔버리는 마녀 키르케, 영생을 약속하며 그를 7년간 곁에 둔 요정 칼립소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제우스, 아테나, 포세이돈, 헤르메스 등 올림포스의 신들 등등.
이 책이 매력적인 진짜 이유는 이들을 단순한 '주인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나 '전지전능한 절대자'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디세우스에게 닥치는 수많은 시련과 이벤트들은, 알고 보면 우리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욕망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입체적인 생명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신들조차 감정에 휘둘려 감복하거나 복수심에 휩싸이고, 요정이나 거인 역시 저마다의 지독한 외로움과 고집을 가지고 오디세우스와 부딪힌다. 결국 이 여정은 거대한 권선징악의 게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각양각색의 존재들이 서로의 욕망과 신념을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생생한 생명력의 현장이다. 레히너는 이러한 결을 놓치지 않고 묘사하여, 시련마저도 생명력 넘치는 서사로 읽히게 만든다.
3. A Thought : 영웅의 가면 뒤에 숨겨진 깊은 고뇌와 선택의 무게
트로이 목마를 기획하며 10년 전쟁을 종식시켰던 최고의 전략가이자 리더, 오디세우스. 하지만 귀향길에서 그가 마주하는 것은 화려한 승리가 아닌 피 말리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괴물 스킬라와 소용돌이 카리브디스 사이를 지날 때, 배 전체의 파선을 막기 위해 소수 동료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던 리더로서의 겪어야 했던 소수와 다수의 희생 딜레마와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왔으나, 집안을 점령한 구혼자들로 인해 아내와 아들조차 선뜻 믿을 수 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펼치는 환향 후의 고뇌와 냉철한 지략들과 같은 복잡한 오디세우스의 내면을 밀도 있게 담아낸다. 그는 완벽한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동료를 잃고 눈물 흘리며, 끊임없이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 번민하는 '진짜 인간'으로 그려진다.
우리는 그러한 고뇌들 속에서 오디세우스가 내딛는 한 걸음마다 무게를 싣게 된다.
신화를 넘어, 너의 오디세이로
신화와 서구의 옛 문명이 한국 독자에게는 다소 거리가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디세이아》의 본질은 영웅이라는 겉치레를 벗어던진 인간 고유의 내면 서사에 있다. 전쟁의 잔혹함, 조직 내의 갈등과 반란, 번민 속에서 피어나는 죄책감, 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향(本鄕)에 대한 열망과 희망은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삶에서 경험하는 감정과 닮아있다.
만약 지금 영화 <오디세이>가 남긴 진한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거나, 스크린 속 장면에 숨겨진 깊은 배경을 탐구하고 싶다면 레히너의 책에 잠시 머물러보길 권한다.
호메로스의 고전을 친절하고 우아하게 풀어낸 레히너의 시선, 그리고 이를 현대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시지를 비교해 보는 과정은 독서의 즐거움을 극대화해 줄 것이다. 시대에 맞춰 수많은 변주가 이루어지더라도, 우리는 결국 모든 이야기의 뿌리인 원작이 지닌 시들지 않는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P.S. 몰입감을 극대화하는 음향 팁
《오디세이아》의 여정에 깊게 빠져들고 싶다면 영화 <오디세이>의 사운드트랙을 배경음악으로 함께 감상하는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루드비히 고란손 음악감독은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 실제로 사용되었을 법한 목관악기 '아울로스(Aulos)'와 현악기 '리라(Lyre)'를 직접 재현하여 트랙을 구성했다. 여기에 청동기 시대 특유의 거칠고 매혹적인 쇠소리를 더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고대의 음율과 함께 페이지를 넘긴다면, 마치 청동기 신화의 한가운데 직접 발을 디딘 듯한 압도적인 몰입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