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이래 첫 상설전인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는 1960년대에서 2010년대에 이르는 대표작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다층적인 흐름을 조망한다. 본 전시는 추상미술에서부터 실험미술, 형상미술, 민중미술에 이르기까지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매체의 변화, 그리고 당대 국제 미술계와의 역학 관계 속에서 우리 미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개를 장을 마련한다.

1950년대 말 새로운 전위의 미술로 등장한 추상미술은 전후의 불안과 급격한 도시화라는 사회 현실과 맞물려 발전을 거듭해왔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친 앵포르멜 회화와 이후 기하 추상을 거쳐, 1970-8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적 정신성의 발현을 모색한 단색화로 전개되어 나갔다.
이처럼 추상미술이 주류를 형성하는 한편, 1960-70년대에는 급격한 근대화와 산업화 속에서 발흥한 청년 문화, 그리고 정치적 억압에 맞선 자유를 향한 열망이 교차하며 기성 예술의 문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채로운 실험미술의 장이 펼쳐지기도 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 속에서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의 ‘촉각적 시각’ 개념을 중심으로 1970년대 주요 추상미술 사조인 단색화를 정상화의 <무제 74-F6-B>을 통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단색화는 캔버스의 평면성을 지향하면서도, 그 표면 위의 재료의 촉각적 물질성과 작가의 반복적인 신체 수행을 담아낸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작업 과정은 자연의 순리에 몸을 맡기는 ‘무위자연’ 및 ‘물아일체’라는 동아시아 전통 자연관과 연결되며 한국 고유의 독자적 조형 세계로 구축되었다. 평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붓과 안료의 흔적, 손끝의 느낌이 남아있는 단색화의 매체적 특성은 리글의 촉각적 시각성 개념과 맞닿는 지점이 된다.

단색화는 1970년대 초반 <앙데팡당>을 비롯해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 드 서울>을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이후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과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전을 거치며 그 명칭이 공식화되었고 하나의 독자적인 미술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적인 정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 속에서 싹튼 단색화는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모노크롬 회화의 형식을 참조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학을 싹틔운 사조이다. 특히 순수한 시각적 평면성을 지향했던 서구의 추상미술과 달리, 단색화는 매체 고유의 촉각적 물질성을 극대화하고 그 위에 작가의 반복적인 신체 수행을 결합하여 한국 고유의 정신성을 발현해 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단색화의 촉각적 시각성과 수행적 태도가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전에 전시된 정상화의 <무제 74-F6-B>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캔버스의 표면은 물리적 행위가 축적된 시간의 지층에 가깝다.
그는 캔버스 위에 고령토를 3~5mm의 두께로 두껍게 발라 굳히며 화폭 자체를 하나의 촉감적인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고령토가 마르면 작가는 화폭을 가로세로로 꺾어 무수한 균열을 내고, 그 갈라진 틈 사이의 흙을 뜯어낸 뒤 그 빈자리를 아크릴 안료로 다시 메우는 행위를 수개월에 걸쳐 무한히 반복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물리적 노동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가는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물질성을 촉각적으로 구현하며,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물아일체’적 사유를 실천한다.

정상화의 반복적 수행으로 쌓아나간 이 감각적 표면은 리글이 제시한 ‘촉각적 시각성’의 구현을 보여준다. 우선 리글은 양식 발전의 원동력을 고유한 내적 창작 충동인 ‘예술의지(Kunstwollen)’라 규정했다. 이는 객관적 세계를 예술을 통해 정리하여 세계와의 만족스러운 관계 형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지각 방식에 따라 ‘시각적’ 방향과 ‘촉각적’ 방향으로 나뉜다. 대상을 주변 환경과 결합하여 전체적인 모습으로 인식하는 것이 눈의 시각적 기능이라면, 대상을 고립된 모습으로 인식하는 것은 촉각적 기능이다.
리글은 이러한 예술의지의 방향을 통해 고대 이집트 미술과 후기 로마 시대의 공예를 분석하고 이집트 부조를 예로 들면서, 대상을 촉감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서 바라보는 근접시적 거리에서 사물의 고립화를 강조하는 평면적 표현 방식이 관람자의 촉각적 감각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무제 74-F6-B>는 캔버스 안에 3차원의 깊이를 지닌 환영적 공간을 구축하는 대신, 화폭에 밀착하여 고령토를 바르고, 떼어내고, 메우는 근접시적인 창작 방식을 취했다. 리글에 따르면 이러한 근접시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주변 공간과 분리하여 뚜렷한 형태를 지닌 독립적 실체로 파악하는 사물의 고립화를 동반한다.
그는 화폭 위에 무수한 격자의 균열을 내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안료와 흙이라는 물질 자체를 주변의 가상 공간 및 시각적인 환영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물성 그 자체로 고립시킨다. 이로써 이 작품 앞에서 관람자의 눈은 화면의 깊은 곳으로 유영하지 못하고 캔버스 표면 상의 물리적인 요철에 머물게 된다. 시각적 정보를 수용하고 있음에도, 마치 손끝의 감각을 동원하여 물감의 두께와 그 틈새를 더듬으며 그 촉감을 지각하는 듯한 감각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상화의 <무제 74-F6-B>에서 나타난 무수한 사각의 균열 표면은 단색화의 반복적 수행성과 촉각적 물질성이 교차하는 능동적인 장이 된다. ‘비움’과 ‘무위’로 나아가는 신체의 반복적인 작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안료와 고령토의 물성은 리글이 주창한 촉각적 시각성을 유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전시에서 이 작품을 마주하는 관람객은 단순히 캔버스를 시각적으로 관조하는 것을 넘어, 물질과의 근접시적 거리에서 작가의 신체 행위의 흔적과 묵직한 촉각성을 공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는 단색화가 서구 미술의 단순한 수용을 넘어, 수행과 물질의 결합을 통해 신체와 물질, 나아가 자연과의 합일에 다다르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 미술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해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국립현대미술관(2025),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권영진(2014), 「1970년대 한국 단색조 회화 : 무한 반복적 신체 행위의 회화 방법론」, 『현대미술사연구』 36집
김영나(2020), 『1945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 미진사
손예인(2025), 「단색화의 피부적(skin–like) 표면에 대한 미학적 탐구 -수행성과 촉각적 시각성의 경계를 넘어-」, 『기초조형학연구』 26권 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