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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결말과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 보고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영화가 있다. 특별한 내용이나 기술의 영화도 아니었고, 특별한 장소에서 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언니와 함께 침대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빌려 온 DVD를 재생했을 뿐이었다. 그 작품이 바로 영화 <원스 ( Once )>였다. 지금은 줄거리조차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지만, 당시 느꼈던 신기함과 감동,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만큼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후 우연한 계기로 영화 <원스>의 감독인 존 카니의 다른 작품들을 청소년기에 접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영화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중 비교적 덜알려졌지만 최근 재개봉한 영화 <싱 스트리트 ( Sing Street )>는 한동안 나의 인생 영화로 꼽을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영화의 엔딩곡인 ‘ Go Now ’는오랫동안 반복해서 들었던 곡이기도 했다.
최근 극장에서 영화 <비긴 어게인>과 영화 <싱 스트리트>가 재개봉하면서 문득 영화 <원스>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처음 본 지 약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이 영화를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게 될지, 그리고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다시 영화 <원스>를 보며 깨달은 것은 존 카니의 작품들이 단순히 음악 영화라는 공통점만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의 영화들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존 카니 감독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돈과 같은 현실적인 요소보다 자신의 꿈과 이상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영화 <원스> 초반부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는 이루고 싶은 꿈과 돈에 대한 가치관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 그녀: 왜 낮엔 안 불려요?
- 그: 낮엔 사람들이 아는 곡을 찾거든요. 그래야 돈을 줘요. 밤엔 안 듣잖아요.
- 그녀: 내가 듣잖아요.
- 그: 근데 10센트 줬잖아요.
- 그녀: 돈 때문에 하는 거예요?
이러한 특징은 다른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영화 <비긴 어게인>의 성공한 프로듀서 댄과 그레타의 전 남자친구이자 인기 뮤지션인 데이브는 상업적 음악, 즉 창작자가 원하는 음악이 아닌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추구하게 되면서 진정한 음악을 잊어버린 인물들로 그려진다. 반면 순수하게 음악을 사랑하는 그레타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원래 꿈꾸었던 음악가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영화 <싱 스트리트>의 코너와 라피나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만, 서로를 통해 용기를 얻고 자신의 꿈을 향해 과감하게 도전하며 나아간다. 존 카니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현실의 벽을 마주하면서도 결국 자신만의 이상과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와 그녀, 그리고 여러 형태의 사랑
존 카니 감독의 작품에서 나타난 사랑은 일반적인 연인 간의 관계로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 <비긴 어게인>은 헤어진 연인 사이에 남아 있는 애정과 원망, 미련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보여준다. 영화 <싱 스트리트>는 한 남성의 짝사랑이자 첫사랑이 어떻게 두 사람을 정서적으로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지 그려낸다.
특히 <원스>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담아낸다. 어린 시절의 나는 영화를 보며 주인공들의 관계를 쉽게 정의할 수 없었다. 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친구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혹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썸’이나 ‘호감’이라는 표현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그 미묘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녀가 남편과 재회하고, 그가 과거의 연인을 연락하거나 그리워하는 장면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다시 영화를 보면서도 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인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호감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는 그를 좋은 친구로만 생각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가 "남편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장면에서 그녀는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체코어로 "너를 사랑해"라고 답한다. 이 짧은 대사는 그녀 역시 그에게 마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사랑과 꿈이라는 이상보다 가족을 위한 현실을 선택한다. 이처럼 영화 <원스>는 순간적으로 찾아온 사랑의 감정만으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며, 사랑과 함께 얽힌 현실적 조건과 복잡한 감정이 때로는 서로를 이어주지 못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존 카니의 영화는 남녀 간의 사랑만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 간의 사랑이 더 중요한 가치로 제시되기도 한다. 영화 <원스>에서 체코 이민자인 그녀는 어머니와 딸 이사벨을 위해 살아가며, 결국 딸을 위해 자신의 감정과 꿈을 일부 포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남자 주인공인 ‘그’ 역시 런던으로 떠나고 싶어 하지만 홀로 남게 될 아버지를 걱정한다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는 일로 인해 가족과 멀어졌던 댄이 딸 바이올렛과 관계를 회복해 가는 과정이 그려지며, 영화 <싱 스트리트> 역시 가족 간의 갈등과 응원이 주인공 코너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그려진다.
음악이라는 매개체
존 카니 감독은 음악을 단순한 소재가 아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언어로 활용한다.
영화 <원스>에서 남자 주인공은 아일랜드인이고 여자 주인공은 체코인이다. 국적도, 언어도, 나이도 다르며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을 만큼 접점도 없다. 그러나 음악이라는 공통된 관심사가 두 사람을 연결한다.
영화 <싱 스트리트>에서도 마찬가지다. 코너는 모델인 라피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밴드를 시작한다. 음악은 두 사람의거리를 좁히고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된다.
영화 <원스>가 가진 특별함
존 카니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영화 <원스>는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제작비가 부족했던 탓에 최소한의 장비로 촬영되었고, 영상미 역시 세련되거나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되었다. 거칠고 투박한 화면은 오히려 영화에 현실성과 진정성을 부여한다. 마치 누군가의 일상을 우연히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오늘날에는 유튜브 브이로그나 SNS 영상을 통해 폰으로 찍은 자연스러운 영상에 익숙해졌지만, 내가 처음 영화 <원스>를 보았던 시절에는 그런 영상이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홈비디오처럼 보이는 촬영 방식이 매우 신선하고 혁신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어린 시절 내가 받았던 충격과 감동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연출 방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열린 결말
영화 <원스>에서 남자 주인공인 ‘그’는 음악을 위해 런던으로 떠나고, 여자 주인공인 ‘그녀’는 전 남편과 재회한 뒤 그가 선물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후 그가 음악가로 성공했는지, 그녀가 여전히 음악을 꿈꾸고 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기억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영화 <비긴 어게인>과 영화 <싱 스트리트>에서도 반복된다. 영화 <비긴 어게인>의 여주인공 그레타는 음반사와 계약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방식으로 저렴한 가격에 앨범을 발표하며 영화가 끝난다. 영화 <싱 스트리트>의 코너와 라피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작은 보트를 타고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온전히 관객의 상상에 맡겨진다. 나는 이러한 열린 결말이 인생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꿈을 선택할 수도, 포기할 수도, 혹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이 결국 성공으로 이어질지 실패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존 카니 감독의 영화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현실처럼 그 결과를 장담하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가 보여주는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적인 결말이 내가 그의 작품을 꾸준히 사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