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여행의 필수 코스, 곡선의 마술사,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천재 건축가. 우리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라는 이름 앞에 관성적으로 붙이는 수식어들이다. 화려한 타일 장식과 기괴하면서도 웅장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이미지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가우디를 잘 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가우디를 알고 있을까?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수많은 가우디 관련 서적들은 대부분 그의 독특한 건축물 외양을 스케치하거나, 천재성에 기댄 피상적인 호기심을 충족하는 데 그쳤다.
가우디 서거 100주년이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완공을 앞둔 2026년, 한스미디어에서 출간된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그동안 우리가 알던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우디를 철저히 해체한다. 그리고 신화와 전설, 자의적 해석에 가려져 있던 ‘인간’ 가우디의 진짜 얼굴을 우리 앞에 세워놓는다.
함부로 추측하지 말 것, 소 앞에 수레를 놓지 말 것
가우디는 생전에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작업실에 화재가 발생하며 그의 메모와 도면, 스케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기록의 부재는 곧 수많은 추측과 신비화를 낳았다. 누군가는 그의 건축을 보며 상징을 완전히 꾸며내고, 누군가는 맥락 없이 특정 사상과 엮어버리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인 아르만드 푸치는 이러한 현실을 꼬집으며, 철저한 역사적 사실 검증 없이 자의적인 해석을 앞세우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많은 사람이 완전히 꾸며내거나 너무나도 경건하게 추측하거나 사상적으로 추론하여 가우디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가우디는 분명한 근거를 바탕으로 자기 작품을 엄격하게 해석해달라고 요구한다. (...) 방법론적 관점에서 이 책은 '소 앞에 수레를 놓지 않는다'라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가우디에 관해 깊이 연구하지 않거나 그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모든 것을 검증하지 않고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 작가의 서문 중
저자 아르만드 푸치는 가우디의 고향 레우스에서 불과 7km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가톨릭 사제이자 학자다. 가우디가 보고 자란 지중해의 빛과 흙의 색깔, 지역민의 기질,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건축을 관통하는 뼈대인 '가톨릭 신앙'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적임자다.
저자는 엄밀한 문헌 비판과 동시대 사료를 통해 고정관념을 깨부수며, 그를 단순히 기이한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미학으로 빛과 공간, 재료와 형태를 다루는 독특하고 유일한 존재"로 재조명한다.
삶과 신앙, 그리고 건축이 하나로 융합되는 과정
책은 가우디의 건축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며, 그의 삶과 내면이 어떻게 건축물로 발현되었는지 세밀하게 추적한다. 특히 초기의 거침없는 창의성이 깊은 신앙과 만나 어떻게 성숙해 가는지 그 시간적 변화를 따라가는 서사가 흥미롭다.
1883~1893년 초기의 가우디는 '걷잡을 수 없는 창의성'을 뽐내던 패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초기작인 '카사 비센스'를 보면 다양한 예술적 요소가 섞인 오리엔탈리즘이 폭발하듯 펼쳐진다. 식당 벽난로에 새겨진 "화롯불, 사랑의 불이여 영원하라"는 문구에서 엿볼 수 있듯,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가족과 세속적인 삶의 토대에 집중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처음 맡았을 때도 "10년 안에 완공하겠다"는 다소 오만한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894년 사순절의 지독한 단식을 통한 깊은 영적 위기는 그의 예술관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이 시기(1894~1898)를 기점으로 그의 창조력은 단순히 세속적인 장식을 넘어 철저히 종교적인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유행을 선도하는 모더니스트에서, 성당 지하에 들어갈 제대와 전례용 가구를 직접 디자인하며 신에게 바칠 아름다움을 조각하는 '장인'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리고 1898~1911년 후기에 접어들며 가우디의 건축에서 세속과 신성의 경계는 완전히 허물어진다. 민간 주택인 '카사 칼베트'의 지붕에 십자가를 세우고, "믿음, 조국, 사랑"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특히 문손잡이를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사악한 빈대(악과 죄의 상징)를 십자가로 내리치도록 설계할 만큼 가톨릭 신앙을 노골적으로 투영했다. 삶은 갈수록 검소해졌고, "첫째가 사랑이고 그다음이 기술이다"라는 가우디의 말처럼 그의 놀라운 건축 기술은 오직 신을 향한 사랑과 상징을 담아내는 도구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백미는 가우디 필생의 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립 과정을 다룬 부분이다. 초기 10년 완공을 호언장담하던 오만한 천재는, 재정 적자와 느린 공정에 시달리는 현실 속에서 서서히 자기 내면을 비워낸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을 향해 "이 작품의 주인은 서두르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겸허한 구도자로 완성된다.
천재라는 수식어를 넘어, 한 인간의 치열한 구도기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가우디를 '괴짜 천재'라는 얄팍한 상업적 프레임에 가둬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가우디가 자연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작품'을 발견하고 이를 기하학과 역학을 통해 돌과 유리로 번역해낸 철학자이자 장인임을 깨닫게 된다. 쓸데없는 쇳조각과 버려진 도자기를 재활용하여 생명을 불어넣은 그의 손길에는 피조물을 향한 지극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가우디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만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묵직한 이정표다. 2026년 완성될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첨탑을 올려다보기 전, 이 책을 먼저 펼쳐보기를 권한다. 박제된 신화가 아닌, 돌 위에 사랑과 신앙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뜨거운 인간 가우디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