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비가 왔다, 이른 저녁 소나기였다. 이란 출신 친구의 생일 선물을 빙자해 인사동 가는 길이었다, 사막과 샘과 강인함을 상기시키는 그에게 사막 모래빛 수정 팔찌 하나를 사주려 함이다. 가는 길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흠뻑 젖었다, 좋은 기분이었다, 더위를 씻어내리는 비. 아마 그 덕에 오늘 날씨는 겨우 선선했다, 겨우. 승강장 차임 소리가 딸랑이며 울려 퍼지난듯, 여름이 오노라 온 세상이 말해오고 있었다, 이제 곧 열차 들어옵니다, 하고 말하는 듯이. 곧 더워질 것이고 어쩜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마로니에 플라타너스 높이, 흔들거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화역 1번 출구 근처는 사람으로 가득했는데, 그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인적이 드문 연우 소극장을 향했다. 워낙 눈에 띄지 않아 극장을 쉬이 지나치고도 몇 번을 더 헤맸다. 화창한 더위가 지글거리는 지상을 뒤로하고, 소극장의 지하로 걸어 내리는 기분이 이상시리 섭했다. 무언가를 등지는, 또는 떠나오는 듯한 기분 허나, 이 어두컴컴한 지하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기분 묘묘히 뭉근히 차올랐다. 스태프도 오늘 전석 매진되었으니, 다들 붙어 앉아 달라고 당부했다.
무대에는 일본어로 된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대놓고 지저분함을 연출하려는 듯. 오늘의 연극 ‘또 여기인가’는 영화 ‘괴물’로 유명한 사카모토 유지의 작품이라고만 알고 있다. ‘괴물’은 꽤 인상 깊게 보았고, 그 탓에 오늘 연극엔 무언가 일본 영화적인 것이 있겠거니 하였다, 그게 뭔지 아직 설명 못 하겠지만, 뭣도 모른 채 첫 여자 친구와 시청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느낌 같은 것을 무턱대고 기대하는 중이었을까.
한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남자와, 첫눈에 불량스러운 여인이 올랐다. 나루미는 사내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알바로 일한다. 그녀, 사장이 일하는 중에도 오만 불손히 앉아 너 따위 안중에 없다는 것을 톡톡히 알려볼 심산으로 피젯스피너를 돌려대는 그 모양이 꼴같잖다만, 유타로는 이에 똑똑히 으름장 하나 두지 못해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가 소심하게 항변한들 나루미로서는 손쉬운 궤변으로 얼마든지 무력화해 낼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나루미는 조금씩 선을 넘어 이 지경까지 온 것이겠으나, 정작 유타로는 괜찮아 보여 다행이다. 볼기를 한 대 얻어맞은 소처럼 느직하게 목소리나 뽑아두곤 곧 잊어버리는 것 같아 보였다. 고마운 아둔함은 저 사내 자신을 위해 좋을 일이다, 라고 생각했다.
손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주유소에 곧 한 사내가 여인 하나를 끌어대며 등장한다. 사내는 자신을 마코토라 소개하며, 유타로의 이복형을 자처했다. 둘의 아버지는 식물인간이 된 채, 2년이 넘도록 유타로가 홀로 병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껏 연락이라곤 없던 이복형 마코토는, 아버지가 갑작스레 식물인간이 된 사실을 수상히 여기며, 당시 간호사였던 가요코를 추궁해 이리로 데려온 것이었다. 정작 마코토는 지금 돈이 궁하다.
마코토는 소설가로 전국적으로 꽤 알아주는 작품을 썼던 모양이지만, 10대 소녀의 자살을 그려낸 그의 작품을 모방한 사건 탓에 소위 ‘나락’에 떨어진 뒤, 스스로 절필한 퇴물 작가이다. 유타로는 그런 마코토를 알고, 꽤 동경하는 눈치이다. 어떻게든 잘 대접하고자 허둥대는 데 아뿔싸, 사리 판단이 눈에 띄게 느리고 말투는 아둔한 데다, 설상가상으로 강박 장애까지 엿보이니 이거 대하기가 참 난처하다. ‘음료를 드릴까요, 괜찮아요, 보리차밖에 없네요, 아 네 그거라도 좋아요, 아 보리차가 없네요, 괜찮아요, 보리차가 없는데 보리차를 드리겠다고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차마 바라보기에 답답할 노릇.
마코토는 자신이 수사한바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것은 명백한 의료사고라며, 유타로에게 함께 의료 소송에 동참할 것을 채근하고 그 핑계로 주유소를 매일 같이 드나든다. 간호사라는 사람도 수상한 핑계를 대며 주유소를 드나드는데, 알고 보니 유타로의 오랜 간병 기간 동안 눈이 맞았더랬다. 두 사람은 매일 같이 옥신각신 댔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마코토가 소원하던 의료 소송은 물거품이 됐다.
불량한 태도의 나루미까지 해서 총 네 사람이 어울려 지내는 동안 한편, 그저 어리석어만 보이던 유타로에게서 눈에 띄는 특이 행동이 관찰되기 시작했다. 성정이 이기적이기는커녕 어리석을 정도로 순한데, 유독 하지 말라는 것엔 반대로 하려는 고집을 보이고, 그것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 생각해 보면 첫 대면 때 보리차도 그 때문이었고, 아픈 허리를 건드리지 말라는 마코토의 당연한 요구에도, 하물며 말린 미역을 먹지 말라는 당연한 우려에도 꾸역꾸역 제 고집을 부리는데, 부려대는 그 모양이 퍽 난해하다. 달리 자존심을 내세운다든지 심술을 못 이기는 것도 아니이다, 저도 몰래 충동되는 듯한 얼굴의 고요함이란 심히 기묘하다.
주변 사람들이 유타로의 이상한 고집을 막으려 들면 들수록 그는 조금씩 과격해지기 시작했고, 충동조절 장애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극은 슬며시 스릴러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아둔해 업신여김당할지라도 누런 황소처럼 곧잘 잊어버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던 눈치. 그는 오래 담아둔 사건에 생각이 미치고, 일찍이 나루미가 오만 불손히 피젯스피너를 돌리던 모습, 그 광경이 몹시 미웠고, 소심하였던들 정중히 건네본 청을 그토록 처참하게 묵살한 것이 치욕스러웠고, 충동이 일고, 그 충동을 스스로 금지하고, 금지하면 할수록 그 충동은 반동적으로 차오른다. 자신의 불쾌함은 안중에 없던 그 불손한 손, 부탁할수록 거꾸로 더 가열차게 돌아가는 피젯스피너와, 그를 힘껏 돌려대던 그 손, 유타로는 그녀의 팔을 꺾어버리고 싶었고, 그래선 안 되고, 금지할수록 꺾어버리고 싶고, 그래선 안 되고 … 마침내 그 팔을 꺾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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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연극 위기부까지의 전개이다. 그 뒤의 것들을 죄다 설명하는 것은 못할 짓인 듯싶어 줄이련다. 이 위기부로부터 절정부까지는 유타로의 광증이 심화해 가는 과정이기에, 그걸 죄다 소묘하는 것도 성가실 일. 유타로의 강박 장애와 충동조절 장애를 구경하며 객석 구석에서 은근한 생각 속에 빠져들어 갔다, 추억이라기엔 서글프고, 애환이라기엔 뜨거운 감정. 비록 극의 중심을 이루는 공격 충동은 모르지만, 나로선 불안 장애와 강박증을 겪고 지나온 까닭이다.
하필 최근 읽고 있는 책이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였기에, 내 내면에는 어둠을 배경으로 세 인간이 마주 앉았다. 멜랑콜리아의 주인공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조현병 환자로, 높은 불안 증세와 강박적 반추, 심한 환각과 피해망상을 거쳐 현실 검증력이 점차 붕괴해 가는 인물이다. 잠깐 여담을 하자면 이 책은 읽고 있으면 짜증이 확 올라오는 작품인데, 불안과 피해망상과 강박적 반추가 책 전반을 이끄는 테마이기에 독자는 끝없이 맴도는 정신병자의 사고 여로를 반강제적으로 시청하게 된다. 못 이겨 책을 내팽개치지만 않는다면, 독자 여러분은 정신증 환자의 내면을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당신에게, 내 사랑 헬레네, 당신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다. 헬레네, 나는 당신에게 갈 것이다. 당신은 내 말을 기억해야 한다. 내 사랑 헬레네, 당신이 기다려 주기만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꼭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신을 생각하면 안 된다. 내 사랑 헬레네조차 머릿속에 떠올리면 안 된다. 심지어 그들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하면 안 된다. 나는 그저 갈매기들을 보고 갈매기들의 소리만 들어야 한다. 나는 갈매기들을 봐야 하지만, 갈매기들은 보이지 않는다. 갈매기들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갈매기들을 봐야 한다. 만약 갈매기들이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자위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 멜랑콜리아, 욘 포세, 문학동네, 2023, 254p
라스는 정신병원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헬레네는 거기 없다. 헬레네의 부모는 라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엄포마저 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내면에 헬레네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설 자리가 없어, 너무 많은 생각들로 이미 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절, 라스를 바라보는 주변인으로서는 경악스러운 것이고, 그 주변인들을 되바라보는 라스로서는 의뭉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꿈에서 깨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었고, 그때 우리가 깨부수는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자 세계 그 자체이다.
나는 그게 지긋지긋한 동시에 친숙하다, 심지어 감미롭기까지 하다, 책이 어언 20년 가까이 지나 다 잊어버린 내 옛날을 소생하니까. 불안이 끝도 없이 샘솟고 그로부터 강박적 반추가 증식해, 끊임없이 순환하던 그때의 내면을 이제는 흐릿하게 기억한다. 그런 흐릿해진 옛날을 생각할 때엔 얼굴에 카카오 96% 정도의 미소가 베인다, 쌉쌀하지만 달콤해,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 완전히 과거의 이야기가 된 채 굵은 마침표로 갈음한 까닭이다. 여전히 그것이 남긴 그림자를 스치는 삶과 내면 깊은 곳에서 이따금 발견하지만, 마치 돌무덤 구석구석 깊은 곳에 자리한 기름때처럼, 그럼에도 그것은 지금과 분기처리된 채 영영 과거의 일이 되어있는 까닭이다.
한눈에 어딘가 모자란 것처럼 보이는 세 사람은, 내 내면의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1년 내내 입는 라스, 아둔하고 미련한 유타로, 그리고 불안과 강박과 표독이 가시 박힌 과거의 나, 모지리들이었다. 그때 우리가 날 선 눈빛의 닮아있음을 빌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불안이고, 그것은 학습된 몰이해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사랑스럽지 않은 인간들이라 부르곤 한다. 딱히 경멸이나 비하가 아닌 게, 오히려 냉정한 자기진단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잔인한 사실 적시에 뒤이어, 우리는 사랑스러워져야만 한다고 말했다, 오직 그렇게 말해왔다. 사랑스럽지 않기에 사랑스러워져야만 한다는, 간단하고 어려운 사실을 나는 피력해 왔다. 이 냉정함을 빌어 스스로 구원한 이상, 이 차가움이 곧 나의 따스함이라는 사실은 그러나 슬프다.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린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해의 근거를 전형적인 것에 두는 한. 그런 세 사람의 공통점이라 한다면 생각이 매듭지어지지 않아 무한히 증식한다는 간단한 사실에 있고, 어쩌면 뭇 정신증이라는 것의 공통된 역겨움이란 바로 여기 기인하지 않는가 한다. 사람이 한 줄 강물이라면 생각은 한 번에 하나씩 꿈틀거리는 미꾸라지이고, 상반된 생각이 난립한 채 지워지지도 잊히지도 않는다면 끝없이 증식해, 강물은 불어나고 그 안에 검은 일렁임으로 가득 차 이성이 완전히 길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몸소 안다. 사람은 그저 생각을 담고 있는 항아리라면, 범람하는 물결 속에 잠겨버린 사람이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는지를 안다. 그의 육신인 현실은 마른하늘 아래 놓여있지만, 우스꽝스러워 해학마저 되어버린 그의 몸짓이 익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귀찮다는 이유로, 충분하다는 감각으로, 또는 그런 생각조차 없이 슬며시 생각이 매듭지어져 곧잘 망각으로 흩어지는 사람들로서는 이런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마른하늘과 화창한 햇살 아래의 익사를. 그들의 항아리는 고요히 비어 있지만, 우리 안에는 활자들이 튀어 오르고 끝없이 증식함이니, 보이지 않는 미꾸라지처럼! 그리고 이 몰이해가 바로 해학의 원리이다. 힘주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이 수렴하는 사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범람하는 생각의 도가니 자체가 되어버린 혼란스러운 인간뿐 아니라, 심지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자신이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까지이다. 그 사람이 입은 것은 망각의 은혜이나, 그것의 고귀함은 정반대 편에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 그 외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그 원리는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망각의 신이 져버린 인간은 혼란 속에서 스스로 하나씩 하나씩 매듭지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써야 한다. 나는 써야 했다. 사유만으로는 미꾸라지를 전부 헤아리지 못한다. 그것은 항아리 속에 버글거리어, 아주 그 바깥으로 튀어 나가려는 맹렬한 미꾸라지 떼를 눈으로 헤아리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추어탕집 부엌에서 파드득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는 실한 미꾸라지 떼, 정력적인 그것을 우린 손으로 하나씩 꼽아야 하고 10마리씩 훔치어 명주실로 묶어야 한다, 바로 그것처럼 쓰는 것이다. 그렇게 매듭지어진 것을 빈 항아리인 여기 백지로 옮긴 다음, 햇볕에 말린다. 그럼 곧 뽀얗게 말라 푸석푸석해지고, 이내 가루가 돼 풍화될 것이다.
항아리는 백지, 생각을 여기 게워 낸 다음 손으로 하나씩 꼽았다. 아직도 지어낸 활자가 이다지 많은 것은, 아직 더 퍼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음이다. 나는 써야 했다. 우린 자기가 먼저 명확히 이해한 뒤 정리한 것들만을 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전하고, 마침내 이해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써야 한다. 말로써 전할 수 있는 것은 짧은 것들뿐이다,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도록 미리 모양을 지어둔 레고블록 같은 것들. 삶에 레고블록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야, 삶에 마련된 것이 레고블록뿐이라면 전할 수 없는 것들이 반드시 거기 존재한다는, 식은 돌멩이처럼 지루한 사실을 가리킬 따름. ‘라스는 조현병을 앓는다, 유타로는 강박 장애가 있다, 나는 불안 장애를 앓았다’, 이 따위 한 줌 말로는 결코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까지를 우린 써야 한다.
흉중에 담은 것들은 쏟아내는 것만으로 되지 않고, 흘러넘치든, 떠넘기든, 게워 내든, 호소를 하든 간에 영영 되지 않고, 마침내 누군가에게 온전히 닿아 거기 머물러야 한다. 튕겨 나오듯 되돌아져서는 안 되는 것,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되지 않는 존재일수록 닿기 위해 써야 하는 것이고, 그러나 닿지 못함을 깨닫기 위해 쓰는 것이고, 그것조차 지나, 마침내 닿기 위해 쓰는 법을 찾기 위해, 스스로 구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내가 정확히 아는 것은 이뿐이다.
이 서사의 마지막은 백지를 붙잡고 미친 듯이 써 내려가는 유타로의 모습으로 장식된다. 그리고 곧 전에 없던 샛노란 조명을 받으며, 지나온 서사가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루미 씨는 오만불손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 피젯스피너를 돌리고 있었지만, 유타로는 그녀를 제지한다. 범람하던 생각이 한가지 결정으로 갈음하였고, 그것은 이토록 평범한 것이라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지만, 나루미는 이내 머쓱한 핑계를 대며 피젯스피너에서 손을 뗀다. 겨우 이런 것을 위해 우린 써야 한다. 겨우 이런 것이 그토록 어려운 우리는.
삶은 돌고 돌고, 좌회전을 3번 하면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고 마코토는 말했다, “다시 또 여기인가.” 그건 우리의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을 매듭짓지 않으면, 이런저런 생각에 치여 결국 같은 생각을 끝없이 맴돌고, 포화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해, 다시 또 여기로 돌아오고 만다는 것. 유타로는 자신의 강박, 자신이 금지하던 것을 기쁘게 써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글을 쓰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