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보았던 짧은 영상 클립이 떠오른다. 폭격으로 엉망이 된 우크라이나의 시민들이 폐허의 잔해를 헤치고, 폭발음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일터로 출근을 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이었다. 전쟁이나 재난 중에도 필연적으로 일상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곧 역설적으로 그것만이 우리를 버티게 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끼어들었다. 묵묵히 버텨내는 현재를 대가로 과거의 평화를 닮은 미래로 교환 받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안전한 집에 누워 손쉽게 영상을 휙휙 넘기던 위선자의 오만한 감상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화된 전쟁과 재난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오래 박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재난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은퇴한 노인들의 담담한 일상을 그린 연극 <아이들>을 보며 해당 영상이 겹쳐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다. 90분 동안 치밀하고 정교하게 쌓아올린 이야기는 관객을 천천히 끌어안으며 재난의 일상화를 체험하게 한다. 그러다 클라이막스에 다다르며 배경으로만 스산하게 존재하던 재난이 불쑥 튀어나와, 어떻게 비정하게 삶을 흔들어 놓는지를 실감한다.

이곳은 작은 해안가의 외딴집. 원전에서 일하다 은퇴한 핵물리학자 부부 헤이즐과 로빈은 이곳에서 한가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곳은 원전 사고가 일어난 세계관으로, 두 사람은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있지만 자원과 전기를 극도로 아끼며 생활하고 있다. 그러던 중, 오랜 동료인 로즈가 오랜만에 그들의 집을 찾아오며 일상에 균열이 그이기 시작한다. 헤이즐은 너무 오랜만에 본 로즈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만 폭력을 써 버리고, 로즈는 그 충격에 피를 묻힌 셔츠를 입은 채 무대 위로 등장한다.
둘은 금방 오해를 풀고 근황을 나누기 시작한다. 대화의 내용만 보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회포 풀이 그 자체이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불편한 기류가 흐른다. 어른스럽게 반가움을 연기하고 있지만 둘 사이에 분명 엇나갔던 과거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대화에서 헤이즐은 폐허가 된 삶 속에서도 샐러드를 챙겨 먹고 요가를 하고 긍정적인 생각들을 이어가며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삶에 힘쓰는 인물로 그려진다. 한편 로즈는 언제나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긴 하지만 어딘가 염세적인, 어떻게 보면 또 모든 걸 통달한 것 같은 심상함을 지닌 인물이다.
과연 로즈가 이 부부의 집을 방문한 목적은 무엇일지, 그 서스펜스로 극은 중반부로 나아간다. 이후 소들을 돌보러 갔다던 로빈이 귀가하고 셋은 와인을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로빈과 로즈가 과거 연인 관계에 있었고, 그들은 아직도 서로에게 미련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세 사람의 관계는 꽤나 복잡한 과거사로 엮여 있는 듯 싶다. 만약 여기서 극이 끝난다면 '치밀하고 정교하다'는 본인의 평가에 신빙성이 없어질 것이다. 이들이 갈등하는 지점은 감정의 엇갈림, 사랑, 미련따위가 아니다.
로즈가 부부의 집을 방문한 이유가 드러나는데, 현재 원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현장에 투입된 '아이들'이 있다고 로즈는 설명한다. 이들을 밖으로 빼내고, 대신 들어가 상황을 살피며 일할 인력 20명을 모으던 로즈는 마지막으로 이 부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로즈와 로빈은 비교적 쉽게 이 계획에 올라탄다. 암 환자로 두 가슴까지 절제한 시한부인 로즈와 헤이즐 몰래 금지 구역을 밥 먹듯이 드나들며 이미 피폭된 몸이 된 로빈은 삶을 내어줄 명분이 있다. 다만 헤이즐은 다르다. 무서울 정도로 스스로를 검열하며 건강한 삶을 지향하던 헤이즐은 코마 급의 충격에 빠진다. 헤이즐이 이토록 삶에 집착한 이유, 그에게 살아있어야만 하는 간절한 이유가 있다면 그건 딸 로렌이다. 아직 어른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로렌은 헤이즐에게 있어 원전에 들어간 젊은 아이들 보다도 어쩔 수 없이 먼저 돌아보게 되는, 부부만의 '아이'이다.
이 극의 제목은 <아이들>이지만 막상 극중에는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의 개념 만큼은 극이 진행되고 서스펜스가 가중되며 점차 넓어진다. 처음에는 대화 속에 언뜻 등장하는 부부의 네 자녀들, 그 중 첫째인 로렌을 뜻하던 말이 원전에서 어린 목숨을 깎아가며 복구 작업을 하고 있는 아이들로 넓어지고, 최종적으로는 미래 세대 전체를 상징하는 말로 또 한 번 확대된다. 헤이즐은 가장 작은 의미의, 그러나 명확한 실체가 있고 또 닿을 수 있는 아이들(친자식 넷)과 당장 실체를 실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함을 알고, 그렇기에 무겁게 다가오는 거대한 의미의 아이들 사이에서 하나뿐인 몸을 누구를 위해 태워야 할지 깊은 딜레마에 빠진다.
여기서 '상상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 같은 힘을 하나만 꼽자면 바로 상상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그들의 선택을 '숭고함'으로 일축해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더 복잡한 레이어를 지닌 선택이다. 그들은 다만 당연히도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선택의 결과를 각각 상상하고 또 재단할 수 있었다. 또 미래 세대, 또 이 나라의 미래 자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화 시켜 상상할 수 있었다. 로렌을 비롯한 아이들은 이미 자신만의 주관과 삶을 지닌 성인이다. 아픈 손가락인 로렌이 자꾸만 눈에 밟히지만, 그를 세상 밖으로 내보는 것 또한 부모로써 해야 할 일임을 둘은 아프게 실감한다. 대신 그들은 거대한 아이들의 집단을 구하기로 한다. 아니, 구하는 시도를 해보려 한다. 다만 거기에 로렌을 비롯한 친 자녀 넷을 이기적이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끼워 넣어 그들의 미래까지도 한 번 지켜내보고자 한다.
부부가 기어코 로즈와 함께 피폭 구역으로 향하는 결말은 가슴을 울릴 수밖에 없다. 극의 마지막은 로즈와 헤이즐이 요가 동작을 반복하는 것으로 꾸며져 있다. 마치 간절한 기도, 하나의 의례이자 의식, 또 공연 같기도 하다. 곧 죽어갈 운명임을 알면서도, 곧 원전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건강 요가를 반복하는 둘의 모습이 모순적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상화된 재난의 모습이 딱 그러하다. 그들은 원전 안에서도 정해진 시간에 이 요가 동작을 반복할 것이다. 이토록 섬세하고 태연한 일상을 보내왔음을, 그 기억 속에 분명 자신들이 존재했음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아이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