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벌써 몇 번을 가는지 모른다.
제주도의 바다와 한라산, 그리고 온갖 박물관과 자연 관광지들에는 이미 가볼 만큼 가봤다. 그런데도 나는 주기적으로 제주도로 떠나고 싶어진다. 아마도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특별함 때문에 제주도 여행은 특히 더 여행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넘어가는 여정에 고속도로보다는 남해 바다가 있는 것이 더욱 낭만적이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이번에도 제주도에 와버렸다.
여행의 멋진 점은 내가 보내는 모든 시간이 여행의 일부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동안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여행의 일부가 된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거의 20년 만에 용머리 해안에 다시 가보았다. 20년 전의 방문은 당연히 기억나지 않았고, 이번에 본 용머리 바위에서는 ‘용머리를 조금 닮긴 했네..!’ 정도의 감상을 느꼈었다. 그렇지만 용머리 바위를 보기 위해 내려가는 계단에서 보는 풍경이 참 예뻤던 기억이 난다. 귀찮아도 계단을 내려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래서 여행 중에는 귀찮음을 내다 버려야 하나보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행운을 얻을지도 모르니까.
처음으로 가파도에도 가보았다. 운진항에서 10분 정도 배를 타면 갈 수 있는 가파도는 청보리로 유명한 곳이다.
아쉽게도 내가 갔을 때는 이미 보리가 다 익어서 황금빛 보리였지만, 청보리가 아니더라도 작은 섬에 넓게 펼쳐진 보리밭은 정말 예뻤다.
가파도 방문의 또 다른 킥(kick)은 동물들이었다. 방문했던 카페에 있던 커다란 검정 강아지와의 초면 터그 놀이와 곳곳의 그늘에서 쉬고 있던 꼬질꼬질한 고양이들과의 만남은 이 섬에서의 시간을 즐겁게 채워주었다.
가파도는 2시간 정도면 섬을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섬이고 어디를 봐도 바다, 보리밭, 돌담 중 하나가 보이는 곳이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비슷한 풍경 속에서 자잘한 매력을 찾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꽃, 누군가가 바닷가에 쌓아놓은 돌탑, 담쟁이덩굴로 덮인 오래된 돌담 같은 것들 말이다.
작지만 매력이 많은 섬이니 아직 가파도에 가보지 않았다면 한 번쯤 방문해 보면 좋겠다.
특히 청보리를 볼 수 있는 4월 즈음을 추천하고 싶다.
계획 없이 방문한 사려니 숲길은 예상치 못하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였다.
해가 쨍쨍하고 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숲에 들어서자마자 피부에 느껴지는 공기가 순식간에 시원해졌다. '신성한 숲'이라는 사려니의 이름대로, 하늘을 덮을 정도로 곧게 뻗은 삼나무들과 새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함이 어딘가 신령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있는 힘껏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숲의 향을 느끼니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맑은 날씨의 사려니 숲 산책도 좋았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나무와 흙의 냄새가 더 강하게 느껴질 테고, 눈이 내리는 날에는 빽빽한 숲에 순백의 설경이 펼쳐질 것을 상상해 보니 그 어느 날씨와 계절에라도 숲은 늘 가고 싶은 장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산 vs 바다'의 밸런스 게임을 하면 100% 바다를 골랐던 사람이었는데, 사려니 숲 덕분에 앞으로는 종종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제주 공항으로 가던 택시에서 기사님과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기사님은 제주도에는 볼 것이 없다며, 여기저기 전부 딱히 갈 필요가 없는 곳이라고 하셨다. 솔직히 속으로는 '그럼 제가 대신 제주도 살게요.'라고 생각해버렸다.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도피하러 제주도에 온 나와 다르게 그분께는 이곳이 현실이니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여행의 아름다움은 필연적으로 '낯섦'에 있다고 생각한다. 살던 곳과 다른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원래 삶의 책임과 무게를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안정적인 현실에 발을 붙일 수 있게 하는 것들은 동시에 발을 묶어놓기도 하니 때때로 이런 족쇄에서 벗어나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사실 계속 제주도에 와도 질리지 않는 것은 제주도라는 장소가 좋다기 보다 그저 족쇄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뻤던 탓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제주도는 여전히 매력적인 여행지이다. 바다를 볼 수 없는 도시에 사는 나에게 사방이 바다인 곳은 그 자체로 특별하고, 검은 해안과 한라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오름의 갈대밭과 유채꽃은 언제 봐도 아름다우니 말이다. 많은 육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또다시 제주도를 찾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눈 쌓인 사려니 숲을 볼 수 있길, 한라산 등반에 도전해 볼 수 있길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