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도가와 란포의 〈애벌레〉는 본래 〈악몽〉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애벌레’라는 제목이 벌레 이야기처럼 들려 매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 작품에 ‘애벌레’만큼 어울리는 제목은 없다. 꿈틀거리는 짐승의 형상은 번듯한 척하는 인간의 내면과 기묘하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누군가에게는 악몽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의 발현일 수 있다.
작품 속 ‘애벌레’는 스나가 전 중위다. 그는 '도키코'라는 여인의 남편으로, 전쟁에서 큰 부상을 당해 팔다리를 모두 잃었다. 왼쪽 귓불은 떨어져 나갔고, 얼굴을 포함한 온몸은 흉터투성이다. 발성 기능과 청력마저 잃은 그를 도키코는 하나의 ‘팽이’로 여긴다. 그를 바라보는 도키코의 시선은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명예가 필요 없는 짐승이 되다
전쟁의 공을 인정받아 신문에 무훈이 대서특필되고 금치훈장까지 받은 스나가 전 중위. 하지만 지금 그는 말할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를 철저히 사육하며 자신의 욕구 해소를 위해 이용하는 이는 다름 아닌 아내 도키코다.
도키코 부부가 신세를 지는 와시오 소장이 그녀의 정절을 칭찬할 때, 도키코가 가지무침을 씹는 맛처럼 묘한 감정을 느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녀가 그 칭찬을 두려워했던 것은 스스로 타인의 눈에 죄악으로 비칠 행위를 저지르고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개선을 축하한다며 시끌벅적했다. 도키코에게 친척을 비롯한 지인, 동네 사람들로부터 명예, 명예라는 말이 비 오듯 쏟아졌다.
팔다리를 모두 잃은 부상병 중 살아남은 자는 스나가 뿐이다. 그가 생존한 것을 기적으로, 그가 세운 무훈을 명예로운 것으로 치켜세우던 주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자 자취를 감춘다. 전쟁 공로자에 대한 감사함이 옅어짐과 동시에, 영웅이었던 스나가는 한 마리의 ‘애벌레’가 되어 도키코에게 사육당한다.
한때 명예에 집착했던 남편이 그것을 저버리기 시작했을 때, 도키코 역시 명예를 함께 버렸다. 인간이 가장 집착하는 대상 중 하나인 명예는 타인의 인정에서 비롯된다. 명예를 저버렸다는 것은 남의 눈을 신경 쓰는 인간의 면모를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라는 가면을 벗겨내면 본연의 짐승이 드러난다. 도키코는 그 내면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사람다운 모습을 지닌 애벌레
말도 못 하고 듣지도 못하며 혼자서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이 기구하고 불쌍한 도구는 결코 나무나 흙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지닌 생명이라는 점이 그지없는 매력이었다.
도키코의 태도가 부상 이전과 달라진 이유는 이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 말도 못 하고, 듣지도 못하며, 움직이지 못하기에 그는 아내의 보살핌이 절실하다.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느끼는 생명이라는 점은 도키코에게 엄청난 장점이다. 그의 눈에 서린 좌절감은 도키코의 정욕을 자극한다.
그가 느끼는 절망과 고독을 도키코는 여과 없이 바라본다.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는 남편을 보며 그녀는 만족감을 얻는다. 아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슬퍼도 눈물을 닦을 수 없으며, 화가 나도 위협이 되지 못하는 존재. 소리를 듣지 못하는 남편에게 굳이 말을 거는 그녀는 남편의 무력함을 더욱 극명하게 체감하고 싶어 할 뿐이다.
자신의 어디에 이런 ‘끔찍한 감정’이 숨어 있었던 걸까?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이런 본능을 드러내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변태적인 마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본질인지 모른다. 에도가와 란포는 이렇게 해설한 바 있다.
사회생활을 하며 교류하기 위해서는 진짜 나를 숨기고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었다. 내년이면 예순 살이 되는 지금, 가면이 너무 익숙해져 진짜 내 얼굴을 잊고 사는 일이 많지만 그럼에도 가면은 가면일 뿐이다.
- 〈애벌레〉에 대하여 (《탐정소설 40년》에서)
작가가 자신을 ‘이방인’으로 규정한 것은 작품에 투영된 가치관과 궤를 같이한다. 란포가 말한 가면은 도키코가 자신의 음심을 숨겨왔던 모습과 흡사하다. 그녀는 이제 가면을 벗어던지고 날것의 음심을 드러낸다.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본래 모습이다.
사실 사람다운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
희로애락을 지닌 생명이라는 점이 매력이라더니, 그 말조차 그녀에겐 가면이었던 것일까. 도키코는 남편의 눈빛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남편과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창인 그의 눈을 망가뜨린다.
가장 확실한 것은 도키코가 의사 표현을 하는 남편의 눈을 둘이 마음 편히 짐승이 되는데 너무 방해가 된다고 느꼈다는 사실이다.
(.....)
도키코는 남편을 진짜 산송장으로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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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자신의 끝없는 잔학성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만족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남편의 몸에서 눈만이 겨우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게 남아 있으면 뭔가 완전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사람다운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 이는 남편을 향한 시선을 넘어, 자신에 대한 견해이기도 하다. 도키코는 욕구를 가감 없이 풀고 죄악시되는 감정을 토해내는 짐승이 되기를 갈망한다.
앞서 언급했듯 명예를 저버리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인간의 면모를 포기하는 일이다. 도키코가 신경 쓰던 ‘남의 눈’은 이제 남편의 눈마저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기에 이른다. 타인의 시선에서 명예를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결국 ‘눈’을 통해 표출된다. 그녀는 남편이 인간답게 보이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언젠가부터 망설임 없이 그 눈을 파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음란한 괴물은 어디에서 왔을까
도키코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 꼼짝 않는 살덩어리를 보고 있다가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진짜 공포에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키코는 지속적으로 공포를 느낀다. 죄의식에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내부에 잠든 짐승을 스스로 꺼냈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남편의 희로애락을 무시하고 하나의 장난감으로 취급하며 사육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자신의 날것을 보고 두려워진 것이다.
도키코는 그 괴물이 자신의 오랜 일부임을 알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공포를 감내하며 그녀는 남편의 눈을 터뜨리고 나서야 서서히 눈을 뜬다. 남편을 도구화했다는 사실을, 그가 우물에 뛰어들어 빠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나가는 도키코를 용서한다고 했다. 그가 건넨 용서조차 그의 의지인가? 팔다리를 잃고 언어와 청각마저 박탈당한 그가, 도키코의 사육 속에서 유일하게 배설할 수 있었던 최후의 수동적 저항이 아닐까. 도키코는 그의 몸에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문장을 새긴다. 그는 용서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용서라는 형식을 부여받아 도키코의 죄책감을 완성해 준 또 하나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