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손에 쥐는 법은 배웠지만, 놓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일을 쥐고, 관계를 쥐고, 지나간 시간을 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미리 쥐려고 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더 잡고 싶어도 더 이상 손에 쥘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한 손을 펴는 일이 가장 어렵다. 펴는 순간 이미 갖고있는 무언가 흘러내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우리는 자주 손이 아프다. 아픈 줄도 모르면서 아프다.
<쇼타씨의 마지막 출장>은 그 아픈 손에 관한 영화다. 한국으로 마지막 출장을 떠나는 일본인 CEO 쇼타와, 헤어진 연인의 고향 에노시마로 홀로 여행 온 한국 청년 대성이 우연히 라멘집에서 만나고, 쇼타의 사직서와 대성의 편지가 뒤바뀌면서 서로의 삶으로 잠시 들어가게 된다. 출장과 여행, 사직서와 편지, 중년과 청년, 일본과 한국. 영화는 이 깔끔한 대칭 구조 위에서 두 인물이 천천히 움직인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사건이 아니라 두 사람이 무엇을 쥐고 있었고, 무엇을 끝내 놓게 되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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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있으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두 사람이 쥐고 있던 것

쇼타는 강철맨이라 불린다. 회사를 일으켜 세웠고, 가정을 부양했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서랍 속에는 한 번도 제출되지 못한 사직서들이 쌓여 있다. 매번 다시 써서 다시 넣어둔, 펴지 못한 손의 자국 같은 종이들이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낯선 도시의 거리에서, 누군가의 작은 호의 앞에서 그는 자주 잠시 멈춘다. 강철맨이라는 별명을 짊어진 사람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조금씩 부서져 있었다는 것을, 영화는 그의 멈춤을 통해 말한다. 쇼타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그저 잠시 일에서 비켜설 자리를, 누군가의 아빠나 남편이나 대표가 아니어도 되는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그토록 꽉 쥐고 있었는지를 본다. 회사도 가족도 아닌,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대성은 다른 방식으로 손이 아픈 사람이다. 군대를 다녀온 사이 멀어진 연인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를 결국 부치지 못하고, 그녀의 고향 에노시마로 혼자 떠난다.
편지를 쥔 채로 떠난 여행이라는 점에서 그의 출발은 이미 도착이 아니다. 무언가를 끝내려고 떠난 것이 아니라, 끝나지 않게 하려고 떠난 사람이다. 진영이 연기하는 대성은 풋풋함과 미숙함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얼굴, 사랑이 정말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의 얼굴. 진영은 그 얼굴을 과장하지 않는다. 슬픔을 슬프게 연기하지 않고, 망설임을 망설임으로 그대로 두는 방식으로 인물을 살린다. 대성이 일본에서 만나는 사람들 역시 그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그를 잠시 머물게 하고, 먹게 하고, 걷게 한다. 그 사이에 대성은 자신이 쥐고 있던 편지가 사실 상대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쓰는 것이었음을 천천히 깨달아간다.
사직서와 편지가 바뀌는 순간

영화의 가장 영리한 설정은 두 사람이 꽉 쥐고있는 종이가 뒤바뀐다는 점에 있다.
쇼타의 사직서는 대성의 가방으로, 대성의 편지는 쇼타의 가방으로 들어간다.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뒤바뀜은 다른 의미로 읽힌다. 자기 손으로는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을 타인의 손을 거쳐 비로소 내려놓게 되는 과정. 그것이 이 영화의 진짜 구조다. 쇼타는 대성의 편지를 대신 전하면서 누군가의 끝나가는 사랑을 들여다보게 된다. 대성은 쇼타의 사직서를 대신 전하면서 한 사람이 평생을 쥐고 살아온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본다. 서로의 짐을 잠시 들어주는 사이 두 사람은 자신이 짊어진 짐의 모양을 비로소 객관적으로 본다.
내 손에 들려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무게가, 남의 손에 옮겨졌을 때 비로소 보이는 법이다.
머무름이라는 미덕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머무름에 있다.
인물이 어딘가에 도착하면, 영화는 그 도착을 서둘러 마무리짓지 않는다. 에노시마 해변의 햇빛, 라멘집 카운터 위로 피어오르는 김, 누군가의 집 식탁에 놓인 그릇 같은 것들이 인물의 마음을 대신 말해준다. 그래서 관객은 인물의 감정을 설명받는 대신, 같은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기분으로 영화를 본다. 오타니 료헤이와 진영의 호흡도 그 결을 따른다. 국적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인생의 위치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같은 화면 안에 있을 때 발생하는 미묘한 거리감을 영화는 굳이 좁히려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끝내 친구가 되지도, 멘토와 멘티가 되지도 않는다. 다만 잠시 서로의 짐을 들어준 사람으로, 잠시 곁에 있어 준 사람으로 남는다. 그 적당한 거리가 이 영화를 감상적인 우정 영화로 미끄러지지 않게 잡아준다.
내려놓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

우리가 양손에 모든 것을 쥐고 살려고 하는 이유는 잃을까 봐 두려워서다. 그런데 영화는 가만히 보여준다. 정말 잃는 것은 쥐고 있을 때 잃는 것이라고. 손이 아파서 감각이 사라지고, 손이 막혀서 새로운 것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그 상태가 사실은 가장 큰 상실이라고. 손을 펴는 일은 잃는 일이 아니라, 잃지 않기 위한 일이다.
<쇼타씨의 마지막 출장>은 거창한 인생론을 펼치지 않는다. 그저 두 남자가 잠시 서로의 종이를 바꿔 든 며칠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 며칠 안에 우리가 평생 풀지 못한 매듭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관객은 자신의 양손을 한 번쯤 내려다보게 될 것이다. 무엇을 그토록 꽉 쥐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중 무엇을 이제는 펴도 괜찮을지를.
그 잠깐의 시선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건네는 가장 다정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