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서 오는 설레임은 그리 길지 않다고 한다.
함께 한 기간이 쌓은 추억과 정이 사람과 사람을 결속시키고, 서로는 서로의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가 깊어지다 보면 그 사람이 없는 삶이 상상하기 어려워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 깊어진 감정이 영원해진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살아남는 감정과 관계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살아남는' 마음만이 서로를 돌봄의 영역으로 이끈다. 그런 영역까지 누군가를 끌어들여 본 적은 없어서 이게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근데 내가 보기에는 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것 같다.
연극 <너울>에는 그 영역에 놓인 '벨'과 '플로'과 나온다. 20대에 만나 50대를 보내고 있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이들의 사랑은 20대 때처럼 정열적이거나 뜨거워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를 아낀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아끼는 마음의 일부 같다. 아끼니까 상처를 받는 것이다.
연극은 20대의 이들이 모습과 50대의 현재를 교차하며 흘러간다. 로맨스 연극이면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데, 작품의 극초반부터 물음표를 찍게 만드는 장면을 제시했기 때문 같다. 과거에는 애니와 벨이 연인이었다. 플로는 애니의 친구로, 이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게 된다. 그러니까 플로는 한 연인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인물인 셈이다.
극은 플로가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비집고 들어갔는지를 전개해 나간다.
초반에 50대의 플로와 벨이 연인이라는 점과 20대에는 애니와 벨이 연인이라는 것을 공개해놓은 만큼 관객은 플로가 벨과 어떻게 가까워지고, 애니와는 어떻게 멀어지는가를 수사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렇게 놀라운 이유는 아니다. 흔히 사람들이 변명처럼 늘어놓는 새로움일 것이다. 다만 벨에게 플로는 새로운 설레임이라기보다는 해방에 이르게 해주는 인물에 가깝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족과 멀어지고 자신의 지향성을 드러내지 않던 벨에게 애니는 후련함을 주는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때때로 벨을 몰아붙였고, 또 때때로는 그를 더 외롭게 만들기도 했다.
플로는 애니와는 달랐다. 서핑을 즐기며 세계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그는 벨을 그대로 봐주며 그가 숨통이 트일 수 있도록 천천히 이끌어주었다. 벨이 합창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왔고, 서핑이 주는 자유로움에 대해 들려 주기도 했다. 벨은 플로에게 왜 사랑하게 됐을까?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는데. 공감 가는 마음은 아니지만 그만이 준 해방감과 이해가 사랑으로 견인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너울>은 사랑을 비롯한 감정과 관계를 '너울'에 빗댄 작품이다. 연극을 보고 나서 너울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검색해보니 '바다의 크고 사나운 물결'이라고 한다. 그 사나운 물결같이 끼어든 마음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를 어디까지 흔들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끌고가거나 그저 사랑하고 싶었던 것 뿐인 사이에도 균열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편으로는 사랑에 대한 의구심도 들게 한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저렇게까지 할까, 사랑이 뭐길래 저들은 저렇게 치열하게 아파할까, 사랑이 뭐길래 그 긴긴 시간 서로를 보고 살까. 그리고 그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연극은 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질 뿐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정현종 시인은 그의 작품 <방문객>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했다.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오는,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라고. 사람이 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일인데, 그게 사랑에 이른다는 건 얼마나 더 어마어마한 일일까.
<너울>은 그 어마어마한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