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는 말이 많길래 휘둘려서 산 시집이 하나 있다. 정확하게 따진다면 시집은 아니다. 시집 속 시인의 말을 모아놓은 책이다. 때문에 이 책에는 시는 단 한 편도 없다. 제목은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
어릴 때는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말을 읽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작품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의 본질은 작가의 말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 책은 sns에서 시 이전에 시인의 말 또한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문학동네에서 특별판처럼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시만큼이나 시인들의 개성이 강하고, 내용도 다양하다. 그 안에서 몇 가지는 특히 마음이 간다. 우선 내가 적는 이야기는 '시인의 말'만을 읽으며 홀로 한 짧은 생각들임을 밝힌다.
나는 내가 없는 곳으로 갈 것이다.
2012년 여름
서대경
- 문학동네시인선 024 서대경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시인의 말
우리에게 나 자신이 없는 곳이란 없다. 나 자신은 뗄래야 뗄 수 없고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나 있는 것이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없는 곳으로 간댄다.
가끔은 남보다 내가 더 미울 때가 있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 이해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콱 버려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와 이별하고 싶은데.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닌 척을 하면 된다. 평소와 다른 모습의 내가 되어본다. 내가 하지 않을 행동들을 한다. 내가 아닌 내가 된 것 같다. 나는 가끔 내가 없는 곳에서 안주하고 싶다.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2012년 12월
박준
- 문학동네시인선 032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시인의 말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곳에 있는 나와 그곳에 있는 당신은 만날 수 없다. 가벼운 안부를 물을 수도 없다. 당신의 흔적이 아직 나의 세상에 있어서 다행인 걸까, 아니면 더 미련이 되는 걸까. 내가 더 다정한 사람이었다면 보다 좋은 기억들을 많이 남겨주었을까. 어떤 마음보다 미안함이 많이 남는다. 다시 만나면 미안했다는 말을 꼭 해야겠다.
늘 해질 무렵이었다.
새살이 돋아야 했던 기억들
항상 그때였다.
상처가 있는데 안 아프다고
상처가 없는데 아프다고.
생각이 물들 때까지
참 오래 걸렸다.
이제 가볍게 집으로 간다.
2018년 5월
이사라
- 문학동네시인선 105 이사라 시집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시인의 말
즐거워야 하는 귀가길에 어깨가 무거운 날이 있다. 내려놓을 수 없는 가방을 어깨에 이고 있는 기분이다. 어쩌면 그것은 슬픔이라는 짐. 그 슬픔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루는 이별의 슬픔이었다. 내 잘못이 아니고, 네 잘못이 아닌 일은 우리를 이별로 떠밀려 보냈다. 잘못이 없지만 당당하다고는 못 하겠다.
하루는 후회의 슬픔이었다. 그때 그런 행동을 했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 말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때는 그걸 꼭 했어야 하는 거였다. 저번에 나는 왜 그랬을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걸고 맞은 이 시간이 달갑지 않다.
하루는 돌보지 못한 상처의 아픔이었다. 덮어 놓고 살아서 괜찮은 줄 알았다. 이제 아무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 일 아닌 게 아니었다는 걸 나는 그 상처가 흉터로 변한 후에야 알았다. 돌이킬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놓지 못하는 게 있다. 사람들은 그걸 '그럼에도'라고 부르더라. 그럼에도 시간이 간다. 저녁도 오고, 아침도 온다. 오늘 툭툭 털지 못한다고 해서 앞으로도 털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내려놓지 못했다고 저곳에서도 내려놓지 못하는 게 아니다. 오래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가벼운 걸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다.
각자 다른 세상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을 한 곳에 담고 난 것이 제법 멋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어울려야 하고, 조화로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서 내 마음이 더 가는 글을 찾을 수 있게 해 주는 책이었다. 시인의 말에 마음이 간다는 이유로 시집을 사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문학동네 시집은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연결되는 이야기인 탓에 읽기 시작하면 전부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생각에서 완전히 멀어질 수 있는 책이었다. 얻고 싶은 마음을 얻고 싶은 만큼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