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은 현대인이 마주한 ‘근원적인 화’의 정체를 추적한다. 극 중 에이미와 조지는 서로를 아끼는 부부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조지는 에이미의 내면에 도사린 어떠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 감정을 이성적인 대화와 긍정적인 사고로 ‘해결하려고’ 한다. 반면 에이미와 지독한 도로 위 난투극으로 얽히게 된 대니는 에이미와 정확히 같은 결의 분노를 공유한다. 이들을 밑바닥까지 잠식한 이 감정의 뿌리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기질, 그리고 환경
이 화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질과 환경이라는 두 축이 어떻게 한 인간의 정신을 형성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인간에게는 기질적으로 타고난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 피해를 입어도 복수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순한’ 기질이 있는 반면, 타고나길 강렬한 에너지를 지닌 아이들이 있다. 이러한 기질적 차이는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유전적, 혹은 선천적 영역이다.
내면적 감정은 양육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성취 지향적인 사회나 정서적 결핍이 만연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자아 형성 과정에서 강렬한 생존 본능을 내면화한다. 이들에게 세상은 결코 지면 안 되는 곳으로 인식된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질지언정 나 혼자만은 당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치킨게임에서 절대 핸들을 꺾지 않도록 길러지는 것이다. 이러한 기질적 예민함과 환경적 불안정이 결합했을 때, 에이미와 대니가 지닌 ‘참을 수 없이 치미는 분노’는 내면 깊숙이 똬리를 튼다.
현대 의학은 이를 우울증, 불안장애, 분노조절장애라는 '정신병'의 범주로 정의하고 치료해야 할 증상으로 간주한다. 감정이 '증상'이 된다면 개인의 삶의 질을 위해 조절하는 것이 맞겠다. 그러나 이 감정 자체는 치료될 수 있는 병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보다 더 본질적인 무언가이다.
그래 나 정신병자다, 근데 정신병이 뭔데?
우리는 여기서 이 치미는 분노를 ‘병적’이라 규정하는 문명의 체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게 된다. 이성과 질서라는 잣대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시대의 필요에 따라 설정된 자의적인 기준이다. 문명은 그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을 '광기'나 '병'으로 규정하고 사회 구석으로 내몰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해 왔다. 즉, 인간의 원초적 에너지인 디오니소스적인 혼란이 아폴론적인 질서에 의해 배척되고 ‘관리’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이 혼란을 돈과 시스템이라는 질서 안으로 몰아넣어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상충하는 혼란과 질서라는 두 에너지는 결코 온전한 합의점을 찾을 수 없다. <성난 사람들>은 이를 서구적 이성과 동양적 한의 대비를 통해 영리하게 풀어낸다. 작중 아시아인 캐릭터들이 "서구적 방법은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이 충돌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조지가 에이미에게 끊임없이 권유하는 상담, 명상, 그리고 '솔직한 대화'는 모두 이성의 힘으로 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서구적 믿음에 근거한다. 그것들이 일시적으로 개인의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사람 간 관계를 개선하는 효과를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인 해결법이 아니다. 비이성으로 규정되어 이미 배척당한 혼란은 질서 안으로 온전히 편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관리 시스템은 분노의 겉모습을 매끄럽게 다듬을 수는 있어도, 그 내면을 완전히 거세할 수는 없다.
분노는 다스려야 하는, 다스릴 수 있는 대상인가?
결국 에이미와 대니가 지닌 무질서한 감정은 오직 같은 결의 감정과 만났을 때만 공명할 수 있다. 그들이 서로를 파괴할 듯이 달려들고, 서로의 밑바닥을 보이며 진흙탕 싸움을 벌이면서도 끝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질서라는 가면을 쓴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질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화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라는 방법론적 고민 이전에, "그것이 과연 '다루어져야' 하는 대상인가?"라는 존재론적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언어로 명확히 규명될 수 없는 것, 질서 안에 편입되어 관리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어떠한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내면의 무질서를 '고쳐야 할 병'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 존재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성난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때로는 질서 정연한 이성의 언어보다, 통제되지 않는 날것의 분노가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인간 내면의 화는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진정한 공명의 시작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