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첫 연에서부터 대상의 죽음을 말한다. 수미상관 구조로 이루어진 마지막 연에서까지 대상의 죽음을 확실히 못박는다. 시에서 말하는 ‘너희들’은 본인들의 죽음을 계속해서 부정하지만 시 속 화자는 반복해서 ‘너희들’이 죽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 시가 대상의 죽음에 관해 논하는 시이면서 죽음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시라고 생각했다.
시에서 ‘너희들’은 화자가 보기에 ‘이상하게 죽어 있’다. 2연에서 언급이 되었듯이 ‘너희들’의 죽음은 그 누구도 모르고 오직 화자만이 알고 있다. 특정 대상의 죽음 여부를 오로지 화자만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첫 연부터 마지막 연까지 끊임없이 반복해 말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시에서는 ‘죽음’과 ‘삶’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우리는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여긴다. 생명이 잉태되고 태어나며 자라고 죽기까지의 시간이 하나의 삶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생명이 끊기고 지속되던 시간이 멈춰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시에서 화자가 말하는 죽음은 이와 조금 다르다.
3연에서 ‘삶은 거울 안에 있’을 것이라 말한다. 거울의 안과 밖은 반대된다. 나는 이 행을 보고 삶과 죽음은 반대되는 것이라 해석했다. 죽음은 삶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을 모방해도 똑같아지지 못하고 삶 또한 죽음과 동일시되지 못한다. 이를 통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죽음은 생명이 사라지거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닌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거나 본인이 어떤 부조리에 처해 있어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때 느끼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의 삶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을 ‘죽음’이라고 해석했다.
시 속에서 ‘너희들’과 ‘화자’는 상반된 의견을 제시하며 읽는 이들에게 죽음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준다. 화자가 보았을 때 ‘너희들’은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한 이들이고 ‘너희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지 못한 이들이라 해석했다. 본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해 화자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에서 화자가 죽었다고 여기는 대상은 누구일까? 화자가 죽음을 확신하는 ‘너희들’이나 ‘그대들’은 특정 인물이나 특정 단체가 아닌 ‘인간’일 것이다. 인간에게 공통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비슷하든 다르든 어쨌거나 ‘삶’이 주어진다는 것이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5연에서 화자는 ‘너희들’에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고 확신하는 투로 말한다. 여기서 또 ‘너희들’은 화자의 말에 ‘한때는 살아 있었노라고’ 말하지만 화자는 이를 보고 ‘삶의 시신에 불과했던 것’이라 여긴다.
그 후 반복적으로 ‘운명’에 대해 열거하는데 시에서 말하는 ‘운명’은 고통 받고 불운하고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초록빛 시절’은 생명력이 넘치던 때이지만 생명력이 넘쳐본 적도 없고 ‘마른 잎’이 되어버린 운명은 인간들의 삶이다. 화자가 생각하는 삶은 긍정적이기 보다 오히려 부정적인 것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삶조차 살아본 적 없는 인간들은 죽음 그 자체이다. 나는 이 점에서 시에서 말하는 삶이 긍정의 반대인 부정을 의미하고 있어 더 흥미로웠다. 인간의 삶을 애초에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조차 살지 못한 이들을 죽었다고 정의내린 게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살아있음에도 죽어있는 대상들이라는 아이러니가 시에서 등장한다. 6연에서 ‘죽은 자’에 관한 정의가 나온다. 산 채로 죽은 것은 생명력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의미한다. 시는 전반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다루지만 두 단어 다 시에서 부정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사르 바예호는 본인이 불운한 삶을 살았던 만큼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진지한 고찰을 했던 것 같다. 고통스러운 삶과 그 삶을 생명력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시에 드러난다. 옥중에서 트릴세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그때의 감정이 시에 녹아들어 ‘죽음과 삶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