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속임수와 진실, 삶과 죽음, 관찰자와 관찰 당하는 자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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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햄릿을 다시 읽어 보니 예전엔 왜 햄릿을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하였는지 의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 때는 그렇게 읽은 게 아니라 그렇게 배웠던 것 같다. 때로는 배움이 그늘이 될 때도 있는데 한 걸음만 그늘에서 벗어나 보면 대상이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이젠 햄릿을 배우지 않는 나이가 되었기에 그저 그냥 읽어 보니 햄릿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삶과 죽음, 속임수와 진실, 관찰자와 피관찰자라는 이항대립의 늪에 던져진 채 번뇌하는 한 인간일 뿐이었다. 내가 조금 더 자라고 본 햄릿은 그 늪에서 매섭게 속임수를 선택했으며, 유연하게 관찰자와 관찰 당하는 자의 지위를 오가며 끝내에는 초연하게 죽음을 선택했던 사람이었다.
햄릿
뒤틀린 시대로다. 저주받은 내 운명이여, 그걸 바로잡기 위해 내가 태어나다니.
- <햄릿> 제 1막 4장 중
선왕의 모습을 한 유령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은 햄릿. 그는 자신이 근친상간과 살인의 현장인 덴마크 왕가 속에 홀로 서 있다는 걸, 자기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걸 직감한다. 그 과정에서 속임수는 햄릿이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었다. 바로 복수의 도구이자 자신을 보호하는 도구로서였다.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자신의 나라인 덴마크는 온통 거짓과 위선, 뒤틀림으로 가득한데. 그 중에서도 제일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속이고 왕위에 오른 클로디어스 왕이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는 ‘뒤틀린 것을 바로잡는 것’ 의 일부이기도 하기에 햄릿이 나아가는 방향은 단지 당장 클로디어스를 죽이는 것이서는 안 됐다. 왕자로서 왕에게 대항하는 것, 아들로서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는 것, 그 후에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고 살아남는 것, 모든 일이 얽혀 있기 때문에 속도는 느릴 지라도 예민하고 날카롭게 접근해야만 했다. 이 때 아마 햄릿은 할 수 있는 고민은 다 해봤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민 끝에 햄릿은 적과 똑같은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미친 척을 함으로써 자신도 그를 속이는 것이다. 적과 동류의 방법을 택하다니 대범하고도 가차없다. 차이점이 있다면 클로디어스는 속임수로서 진실을 은폐하려 들었다면 햄릿은 오히려 속임수로 진실을 밝히려 했다는 것이다.
속임으로써 진실을 드러내려는 자, 얼마나 영민한가. 그렇게 햄릿은 오필리어의 앞에 옷을 풀어헤치고 무릎을 떠는 광인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를 속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햄릿의 광인 연기는 클로디어스로부터 햄릿을 보호한다. 클로디어스는 자신이 선왕을 살해했다는 것을 햄릿이 아는지 모르는지 헷갈려 하는데, 겉으로 보이는 햄릿은 영락 없는 미친 사람이라 클로디어스가 햄릿을 죽이려는 시도가 지연된다.
이렇게 속임수 안에 몸을 숨긴 햄릿은 그 때문에 끊임없이 관찰 당하게 된다. 폴로니어스가 햄릿이 미친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오필리어와 햄릿을 만나게 한 후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장면, 혹은 햄릿의 친구들인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을 파견해 햄릿을 떠보려는 클로디어스의 모습 등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보통은 피관찰자가 관찰자보다 힘이 없다. 그런데 햄릿은 주시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자신을 관찰하려는 자들을 역으로 관찰하고 조롱한다.
햄릿 : 거짓말보다 하기 쉬운 걸세.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고 입으로 이렇게 불기만 하면 되네. 자, 보게, 이게 구멍이야.
길든스턴 : 허나 그것들을 조화로운 소리로 내지 못할 겁니다. 제게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햄릿 : 아니, 여보게. 그렇다면 자네는 여태 나를 이 피리만도 못한 물건으로 생각했단 말인가! 자넨 지금 나를 조종해 연주하려 들지 않았나. 내 비밀의 핵심을 끄집어내고 싶어 안달을 하던데. 내가 마치 피리인 양 최저음에서 최고음까지 내보려 했지 않은가?
- <햄릿> 제 3막 2장 중
전사처럼 말의 날을 벼려 사람을 찌르는 햄릿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나는 늘 이 장면에서 그와 적이 되고 싶지 않은 매서움을 느낀다.) 폴로니어스조차 햄릿의 말을 듣고 ‘미친 사람은 가끔 적절한 표현으로 정곡을 찌른다’고 표현한다. 말 안에 뼈가 있고, 속임수 안에 진실이 있는 셈이다.
이러한 그의 관찰력은 그가 온전히 관찰의 주체가 되었을 때 더욱 돋보인다. 바로 배우들에게 선왕 시해 장면을 반영한 <곤자고의 암살> 연극을 주문하고,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클로디어스를 유심히 살펴 진실의 증거를 포착한 것이다.
햄릿의 연극은 그를 둘러싼 비극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만든다. 진실을 들킨 클로디어스가 햄릿의 숨통을 조여오는 와중에, 햄릿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사건을 마주한다.
햄릿은 호레이쇼와 오필리어의 장례식을 보려고 묘지에 왔다가 어린 시절 자신이 알고 지내던 궁정 광대 요릭의 두개골을 본다. 예민하게 상황을 살피고 복수를 완수하려던 그는 가까이 다가와 자기 손에 들린 죽음, 즉 요릭의 두개골을 통해 삶이 모두 덧없다는 걸 몸으로 깨닫는다. 사느냐 죽느냐 하던 고뇌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햄릿은 자기 운명이 이제는 죽음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는 걸 통감한다. 이어지는 뒷이야기는 알다시피 햄릿의, 모두의 파멸이다.
다시 마주한 햄릿
이항대립은 통상적으로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구조를 보이는데 햄릿 안에서는 속임수, 관찰자, 죽음이 그렇다. 일단 콜로디어스가 속임수로 왕위를 차지한 후 권력을 유지하고, 관찰 당하는 사람은 관찰하는 사람의 앞에서 무력하게 노출되며, 비극에 얽힌 모든 인물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대립구조를 이용하며 우위에 서 있는 한 쪽을 조롱하고 조소하는 인물이 햄릿이다. 그는 속임수를 이용해 진실에 가까워졌고, 그의 죽음은 덴마크의 비극을 세상에 알리고 올바른 지도자인 포틴브라스에게 덴마크의 왕위가 넘어가게 했다. 그는 관찰당하면서도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오히려 관찰하는 자들을 당황케 했다.
글의 처음에서 나는 햄릿이 다시 보였다고 했지만 어쩌면 햄릿이 날 보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아니면 서로 마주 보았거나(가끔 살아있다고 생각이 드는 등장인물이 있는데 그게 햄릿이다. 보이지 않는 눈이 나를 본 것 같다.). 어쨌든 햄릿은 보여지는 사람보다는 보는 사람이다. 어쩐지 그를 마주친 느낌이 든 것처럼 그도 나를 관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의 첨예한 성정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도자로서의 햄릿이 뒤틀린 시대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동안 인간 햄릿의 일생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는 건 씁쓸하다.
제 3막 3장에는 클로디어스가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클로디어스가 천국은 속임수가 통하는 공간이 아니니 이 죄를 씻으려면 어떤 기도를 올려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모든 일이 잘 되겠지,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런 클로디어스를 햄릿이 바라보고 있다.
만약 클로디어스가 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햄릿의 앞에서 진심으로 뉘우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애초에 선왕의 유령이 햄릿을 채찍질하지 않았다면?
매 순간 되돌릴 수 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 하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남는 것이라는 걸 안다.
슬픈 일이나, 그 결말이 비극이라 해도 고뇌하는 인간상 자체를 보여준 햄릿의 인생을 고결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유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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