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언니, 젊은 사람들이 왜 자꾸 죽는 걸까 [도서/문학]

삶과 죽음, 꿈과 현실 그 어디쯤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하여
글 입력 2023.08.0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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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다양한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듣는 건 나의 소소한 취미다. 얼마 전에도 여느 때와 같이 플레이리스트를 뒤적거리다가 ‘일상의 효정’이라는 유튜버의 <언니, 젊은 사람들이 왜 자꾸 죽는 걸까>라는 제목의 영상을 발견했다. 강렬하고도 슬픈 제목에 이끌려 영상을 눌렀다. 설명란을 보니 이서수의 『젊은 근희의 행진』이라는 단편집 속 문장이었다. 

 

그날 바로 책을 샀다. 책에서 다시금 “언니, 젊은 사람들이 왜 자꾸 죽는 걸까?”라는 문장을 마주했고,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라는 단편의 두 번째 페이지를 읽는 중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왜 자꾸 죽을까. 어째서 자꾸만 죽음에 가까워지려고 하나. 그런 생각으로 작품을 읽어나갔고 다 읽었을 때는 삶과 죽음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삶과 죽음 사이를 달리고 있는 이들



화자 가진은 프리랜서 작가인 동시에 배달 아르바이트생이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은 많은 것을 뜻하는데 집에서 시간적 여유를 가지며 방해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동시에 가진처럼 배달업에 뛰어들지 않고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수입이 적을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창작자들이 자기 작품을 열심히 홍보하며 팔고 있는데, 도대체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글이 아니라 그림을 택했다면 이런 마켓에 서볼 수라도 있었을까.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난 이 사회에서 번듯하게 자리잡고 살아가는 사영을 만날 때마다 나까지 번듯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실은 전혀 번듯하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가진은 본인과 본인의 상황에 대해 무척 비관적이다. 소설 내내 일어나는 사건, 만나는 인물마다 비참하고 형편없는 자신의 현실을 엮어본다. 가진이 이렇게 된 데에는 작가라는 꿈을 선택한 이유가 크다. 그러나 수미 언니가 했던 말마따나 가진은 “확신할 수 없는 재능과 뜨거운 열정만 갖고 꿈을 이루려는 사람”이다. 꿈과 현실 중 꿈을 선택했지만, 세상에는 확실한 재능이 있으면서 노력까지 하는,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질주하는 사람들이 널렸다. 그 속에서 가진은 꿈을 선택했음에도 처절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사영 또한 처절한 현실을 몸소 겪고 있다. 사영은 응급실 간호사이다. 표면상으로는 삶과 죽음 그 어디에도 더 가깝거나 멀지 않고 적당한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지만, 사영이 가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모조리 죽음뿐이다.


 

힘들지……. 며칠 전엔 자살자가 왔어. 젊은 남자였는데,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에 방에 연탄을 피웠어. 

죽었니?

어.

(……)

언니, 젊은 사람들이 왜 자꾸 죽는 걸까?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사영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꿈같은 건 없어 보인다. 죽기 직전의 사람을 살리지만 그런 사람이 죽을 때, 죽은 후 시신을 처리해야 하는 일에 큰 죄책감과 괴로움을 느낀다. 응급실 간호사라는 직업과 이에 대한 사영의 생각, 감정이 누군가를 살리는 것에서 오는 책임감과 뿌듯함보다는 죽음 그 거대한 하나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네가 이 세계에 대해 뭘 안다고. 너는 이 시대에 오히려 더 필요한 인력이 되었잖아. 

(……)

그런데 사영아, 너는 그런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 거 아니야. 코로나 시국에 잘릴 걱정도 없을 거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그러나 표면적으로 봤을 때 사영은 누구보다 삶에 가까이 맞닿아 있는 사람이다. 직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고 통장으로 주기적인 수입이 들어온다. 가진의 입장에서는 돈 걱정 없이, 많은 이들이 직업을 잃었던 코로나 시국에 오히려 더 필요한 인력이 되어 직업 잃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인물이다. 말 그대로 사영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가진은 삶과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그것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진 않기 때문에 삶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수미 언니에게 편의점 맥주를 얻어먹고, 배달 건수가 줄어들까 봐 인구수가 적은 지방으로 이사 가지도 못하는 삶은 오히려 죽음을 향해 가는 느낌이다. 앞서 언급했듯 가진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한없이 낙담하는 것 또한 죽음처럼 암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렇듯 두 사람은 비슷하면서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가진은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 일명 서일페에 가자는 가진의 연락에 그녀를 만났지만, 사영의 고통에 공감하기는커녕 돈 걱정 없겠다는 생각만 드는 스스로를 깨달으며, 본인의 고통만 늘어놓곤 프리랜서의 고통은 짐작조차 해보지 않으려는 듯한 사영을 보며 왜 서로가 만나고 있을까, 하고 무력하게 의문을 품는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꿈과 현실이란



가진과 사영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꿈과 현실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꿈과 현실이라는 갈림길에 한 번씩은 서게 된다. 꿈을 선택하면 무조건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현실을 선택한다고 해서 낭만이라고는 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

 

 

언니, 얼마 전에 프리랜서 청년들이 동반 자살한 기사 봤어?

나는 파스타 면발을 포크로 감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반지하방의 창문과 방문을 테이프로 단단하게 봉하고 연탄을 피웠다는 걸. 그러나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영은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유서를 남겼는데,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썼어. 그리고 미안하다고.

진심일까? 나는 그렇게 묻고 싶은 걸 참았다.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나 역시 잘 알았다. 달마다 월급이 꽂히는 통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 불안감을 절대로 모를 것이다. 불안이 깊어지면 불신으로 바뀌고, 나중엔 해일 같은 원망이 밀려온다. 그런데 미안하다니. 도대체 누구한테? 나는 자살자가 작성한 유서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냥 마음껏 원망하면 되는데. 그건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청년들이 프리랜서인 걸 보니 아마도 그들은 꿈을 선택한 청춘인 듯하다. 그러나 코로나로 일감이 끊기고 돈과 생계라는 현실에 부딪히자 죽음을 선택한다.

작가는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의 양극단을 사영, 가진, 잠시 나오는 작은 인물 등 개인 서사를 통해 꿈을 선택했을 때, 현실을 선택했을 때 따라오는 상투적인 시선과 편견을 깨버린다. 꿈을 선택한다고 해서 훨훨 날기만 하진 않다는 것을, 현실을 선택한다고 해서 아무런 열정 없이 밋밋하게 살아가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꿈이 등장하면 연이어 언급되는 것이 바로 ‘돈’이다. 화자 가진이 금전적으로 힘든 상황에 놓인 인물이라 그런지 그녀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이 소설은 꿈과 돈에 대한 내용이 여러 번 나온다.


 

도대체 우리는 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돈이 없나. 꿈과 돈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언니도 알았다. 꿈을 제대로 이루거나 완전히 버려야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인생은 힘줘야 하는 일과 힘 빼야 하는 일이 있어. 언니랑 그 언니는 힘 빼야 하는 일에 힘을 주는 게 문제 같아. 꿈은 힘을 빼야 하는 일이야. 현실은 힘을 줘야 하는 일이고.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수미 언니도 한때 배우를 꿈꿨지만, 열정만 있고 재능은 없었고 소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여 소주방이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일하다가 결국 모아둔 돈이 거의 없는 상태로 가진과 편의점에서 육포를 뜯고 맥주를 마신다. 사영의 말대로 꿈에는 힘을 빼고 현실에는 힘을 주는 게 정답일 수도 있다. 꿈과 돈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러지 않으면 좋으련만 꿈과 돈은 연결되어 있다. 꿈을 선택하면 현실이 뒤따라오고 현실을 선택하면 꿈이 눈에 밟힌다. 어쩌면 우리는 꿈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뭘 선택하든 결국 하나의 길로 연결되는, 의도할 수 없고 개척할 수 없는 미로같이 혼란스럽고 복잡한 인생을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에서 꿈과 현실은 실은 그리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참 무력하게 만든다.


 

 

발 없는 새가 앉을 수 있는 3천만 원짜리 아파트



현재는 고단하다. 현실은 고통스럽다. 끝내 어디에도 앉지 못하고 허공에서 죽음을 맞이한 참새처럼.

 

 

사영아, 내가 그 얘기 해줬나? 참새 죽이기 운동. 

아니. 참새를 왜 죽여?

옛날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야. 참새가 농사를 망친다고 생각한 마오쩌둥이 참새를 모두 없애라고 명령했어. 그래서 씨가 마를 정도의 대학살이 시작됐지. 근데 학살 방법이 너무 단순하고 끔찍했어. 참새가 절대로 내려앉지 못하게 한 거야. 그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게 했어.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지. 근데 그렇게 했어. 인간들이 독하게 그렇게 했어. 내려앉으려는 참새만 보면 계속 내쫓았어. 결국 참새는 공중을 계속 날다가 힘없이 떨어져 죽었어. 너무나 고단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견디다가. 근데 사영아,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집이 없는 우리도 그 참새 같다는 생각. 어디에도 내려앉아서 쉴 수가 없잖아.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그들은 발이 없는데 세상은, 혹은 누군가가 또는 스스로를 떨어뜨리려고 한다. 발이 없어 어딘가에 두 다리를 뻗고 꼿꼿하게 설 수조차 없는 그들을 자꾸만 떨어뜨린다. 

 

시간이 흘러 가진은 환자에게 폭행을 당한 후유증으로 응급실 간호사를 그만둔 사영을 만난다. 만나서 서일페에서 가진이 사영에게 말했던 3천만 원짜리 아파트를 보기 위해 군산으로 향한다. 가진은 서일페 입장 줄을 기다리며 사영에게 고흥이나 군산에 있는 아파트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3천만 원, 혹은 천만 원 정도의 오래된 아파트를 사고 싶다고 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없는 자리를 만들어 내 자리라고 우기고 있다는 생각. 공짜를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생각. 공짜를 좋아하면 돈을 아낄 수 있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언젠가 3천만 원짜리 아파트를 사고 싶었다. 그런 서울의 집값에 비하면 훨씬 현실적이고, 노력하면 닿을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런 꿈이라도 있어야 버티고 살지.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이 나라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아야. 그리고 꼭 필요한 한 사람도 있다.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가진은, 자신을 향한 비난을 멈추지 않는 가진은 바라는 것이 있다.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또 하나 있다. 3천만 원짜리 오래된 아파트가 가진의 자조를 비집고 자리 잡고 있다. 그런 꿈이라도 있어야 버티고 산다. 무언가라도 품어야,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라도 해야 버티며 살아갈 수 있다.


누군가,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가진과 사영이 보여준다.


 

언니,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그래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해야 해. 그냥 돌려보내면 갑자기 죽을 수도 있거든.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데, 본인은 물론이고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있어. 그러니까 사람은 자주 만나서 서로를 잘 살펴봐야 해. 혼자 있으면 안 돼.

(……)

같이 살자는 말을 할 수 없다면 자주 보자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 너머 어딘가와 이곳 어딘가의 사이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우리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었다. (……) 그러나 이런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너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나는 왜 너에게 이해심을 요구할까. 그냥 이대로도 우리는 잘 지내는데.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우리가 여전히 기숙사와 월세방을 맴돌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될 것이다. 언제쯤 어디에 발을 내릴지 모른다는 것은. 일단 발을 내려야 그다음을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한다고 생각했으면서 가진은 사영을 또 만났다. 만나서 가진이 사고 싶다고 말했던 아파트를 보러 가자는 사영을 따라 군말 없이 군산으로 함께 왔다. 사영에게 같이 살자는 말을 할 수 없다면 자주 보자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고 가진은 생각한다. 가진에게 사영이 어떠한 의미가 생긴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함부로 말하기에 사영은 꽤 소중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소중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만나도 손부터 잡게 되는 그들이었기에. 

 

참새 같은 이들이 있다. 어디에도 앉아 쉴 수 없는 우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잘 살펴봐야 한다. 떨어지지 않게, 집은 없을지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서로가 있으니까. 발 없는 새라고 해서 날개까지 없진 않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자꾸 죽는다. 수능을 앞두거나 치른 고등학생부터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 학교 밖에서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씩 하며 살아가는 대학생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직장인까지. 이미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조금만 더 버티자, 조금만 더 노력하자는 뻔한 위로 따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뻔한 말은, 그저 가진처럼 3천만 원짜리 아파트를 몸 어딘가에 품은 채 함께 살아보자는 것. 금방 닿을 것 같지만 어쩌면 평생 가지지 못할 수도 있는 그것을 가끔은 미친 듯이 갈망하고, 발을 내디딘 다음을 떠올리며 포근해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가진이 사고 싶어 했던 아파트의 모습은 결말에 다다를 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가진이 지도로 아파트 위치를 확인하며 주변에 마트는 있는지, 사영이 좋아하는 분식집은 있는지 알아보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정말 바람과 희망에서 끝나는 허상이라는 듯 아파트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작가가 의도한 지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파트가 어떻게 생겼고, 그 주변은 어떤 모습이며 3천만 원짜리 아파트치고 괜찮다,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면 그거야말로 꿈같을 것이다. 현실적인 느낌, 삶과 죽음, 꿈과 현실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결말까지 유지하기 위해 이리 마무리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또 뻔하게 하고 싶은 말은 소설에 등장하지 않은 아파트가 가진과 사영에게 안식처가 되길 바란다. 끝내 앉아서 쉴 수 있는 집이 되길 바란다. 가진과 사영, 누군가와 우리들이 각자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에서 편히 쉬었다가 다시 푸드득 날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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