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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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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살아온 방식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이는 평생 죽음을 준비하며 살고, 어떤 이는 평생 그것을 외면하며 산다. 그런데 베르나노스의 이 작품은 묻는다.

 

과연 준비한 자가 잘 죽고, 도망친 자가 못 죽는가?

 

프랑스 혁명의 단두대 앞에 선 카르멜 수녀들의 이야기는 그 물음에 쉽게 답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얼마나 예측 불가능하고, 얼마나 서로 뒤엉켜 있는지를, 잔인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처절하게 그려낸다.

 

 

 

잘못 주어진 죽음


평생을 엄격한 신앙으로 살아온 구 원장 수녀의 죽음은 이 작품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장면이다. 그녀는 한 평생 죽음을 묵상했다. 수녀원의 규율을 지키고 수녀들을 이끌며, 마지막 순간만큼은 공동체의 모범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실제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는 하느님을 향해 절규하고, 자신이 평생 쌓아온 믿음이 무너지는 고통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그 죽음은 고요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은, 처참한 죽음이었다. 


반면 블랑슈는 처음부터 공포로 가득한, 연약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가르멜에 들어오면서 스스로 '그리스도 임종 고난의 블랑슈'라는 이름을 택했다. 그리스도의 임종, 그 고난의 순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으며 이미 자신의 소명 안에 공포를 품고 들어선다. 그리고 그 이름처럼 그녀는 끝까지 떨었고, 도망쳤고, 살아남았다. 마지막 순간에는, 단두대 앞에서 수녀들의 노래를 이어받으며 가장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 뒤집힌 결말을 이해하는 열쇠를 콩스탕스가 건넨다.



"마치 옷장에서 딴 사람 옷을 잘못 주듯이 죽음을 잘못 골라주신 것 같아요.

그래요, 그건 다른 사람의 죽음이었을 거예요.

우리 원장님에게 맞지 않는, 그분에게는 너무 작은 죽음이었어요."



콩스탕스는 이것을 신의 실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잘못 주어진 죽음'이 어쩌면 천주의 논리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행과 불행은 마땅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에 더 가깝다고. 



"사람은 각기 자기를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서로를 위해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 대신에 죽는 겁니다."

 

 

구 원장 수녀의 처참한 임종은 블랑슈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심었고, 그녀를 공동체에서 도망치게 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어쩌면 블랑슈의 공포와 비겁함과 약함을 미리 짊어지고 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블랑슈는 가장 평온하게 마지막 소절을 노래할 수 있었다. 이 지독한 교환을 통해, 죽음은 단절된 종말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대신 안을 수 있는 연대의 자리가 된다. 가장 약한 사람이 가장 강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가장 강한 사람이 가장 초라하게 무너지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이 죽음을 그리는 방식이다.


우리는 한평생 죽음이라는 거대한 공포를 다스리며 살아간다. 때로는 직면하고 때로는 외면하며, 혹은 기도로 매달리거나 비겁하게 도망치기도 한다. 공통된 진리는, 그 누구도 죽음을 완벽히 길들이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임종을 그리는 자도, 영원히 회피하는 자도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몫을 수행할 뿐이다. 그 몫의 크기는, 무작위로 결정된다.


 

 

신앙과 용기


 

"공포심과 용기를 구별하는 일은 저에겐 결국 부질없이 느껴지고,

두 가지 다 우리에겐 겉도는 어설픈 장신구같이 보입니다."

 


부원장 마리아 수녀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이다. 그녀는 순교를 직접 기획하고, 수녀들을 독려하며, 죽음을 가톨릭의 명예를 지키는 싸움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순교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쟁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나노스는 그녀를 정작 순교의 현장에서 빠지게 만든다. 결국 의지로 준비한 자가 아닌, 두려워하면서도 나아간 자들만이 단두대 앞에 서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결심으로 쟁취하려는 용기가 자칫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신앙의 이름을 빌린 영웅주의는 진짜 신앙과 다를 수 있다.


용기는 오히려 마담 리두안(새 원장)의 겸손함과 콩스탕스의 명랑함 속에서 엿보인다. 그들은 죽음을 정복해야 할 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받아들여야 할 하나의 몫으로 여긴다. 수녀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바친다'는 표현조차 꺼린다. 자신들의 죽음에 어떤 가치나 의미를 붙이는 것 자체를 경계했다. 죽음을 숭고한 자기희생의 연출이 아닌, 단지 자신들의 신념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죽음을 함께 맞이함으로써 끝까지 합치된 하나의 공동체로 남는 길을 택했다. 

 


블랑슈 사실 제겐 다른 피난처가 없습니다.

 

원장 우리 수도회 '규칙'은 피난처가 아닙니다. 내 딸이여, '수도회 규칙'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규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 아래에서 뜻을 함께하겠다는 선언이자, 두려움과 공포를 안고서 그분과 함께 걷겠다는 처절한 순종이다. 그 처절함을 이 작품은 말이 아니라 죽음으로 보여준다.

 


 

약한 자의 귀환


도망쳤던 블랑슈의 뒤늦은 합류를 과연 ‘승리’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용기의 형태도, 죽음의 형태도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다. 수녀원이 위협받고, 동료들이 체포되고, 아버지가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녀는 죽음 앞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블랑슈는 수도원의 성벽이나 동료들의 지지 없이, 황폐한 고립 속에서 오직 자기 내면의 공포와 대면했다. 누구의 강요도, 비난도 없는 상황에서 비겁하게 숨어 지낼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스스로 단두대 앞으로 걸어 나와 노래한다.


블랑슈의 등장은 극적이고 눈부신 용기의 걸음으로 보이지 않고, 더 이상 숨는 것이 삶이 아님을 알게 된 사람의 걸음으로 묘사된다. 이 장면은 우리의 공포, 약함, 비겁함마저도 끝내 구원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수녀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단두대의 칼날 아래 사라질 때, 블랑슈가 이어받은 마지막 소절은 텅 빈 자리를 채우는 마침표였다. 두려움과 결핍 속에서 흔들리던 존재들의 목소리가 서로를 붙들며 완성한 하나의 고해성사처럼 울린다. 블랑슈의 목소리가 가르멜의 합창을 완성하는 순간, 그 멜로디는 비로소 죽음의 공포를 지나 어떤 평온에 도달한다.


이 작품은 죽음이 얼마나 불공평하고 예측 불가능한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엮이고 서로를 대신하며 끝까지 함께 있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통제할 수 없는 것 앞에서도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것을 남기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우리가 오래전에 자유를 벗어버린 만큼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그걸 빼앗아 갈 수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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