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엘리자베스(Elizabeth)" 이 이름에는 다양한 인물이 있다. 흔히들 가장 먼저 떠올릴 인물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2세일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유명한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역사 속 여성이 있다. 바로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 엘리자베트이다. 그녀가 누군지 잘 모르겠는 사람들도 그녀를 모티브로 한 뮤지컬이 그 유명한 <엘리자벳> 이라는 사실을 들으면 그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소개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황후 엘리자베트>는 단지 엘리자베트 황후의 개인사만이 아니라, 곧 유럽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전쟁의 서막과 연결되는 이야기이다. 도대체 엘리자베트는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이렇게나 많은 예술에서 그녀를 주인공으로서 다루는 것일까?

 

 

 

격변의 시대


 

18세기는 현대의 사상이나 정치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그야말로 대격변과 혁명의 시기였다. 1775년에 시작된 미국의 독립전쟁은 세계 최초로 근대적인 민주공화국을 세웠으며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시민혁명은 인권 선언과 입헌군주제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 그 한편에는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더욱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태어난 1837년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막 초래된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돌입하여, 격변기를 지나 산업화와 제국주의 경쟁이 절정에 달한 시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 중심에 있었고, 황후 엘리자베스는 그 화려한 궁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궁정의 금빛 장식 뒤편에는 다민족 제국의 균열과 혁명의 바람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황후


 

엘리자베트는 바이에른 공국의 공주와 공작의 딸로 태어났다. 현재는 바이에른이 독일의 한 주이지만 이 당시에만 해도 바이에른은 하나의 공국이었다. 그녀가 15살이 된 해에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은 본래는 그녀의 언니 헬레네가 프란츠와의 약혼 상대였으나, 엘리자베트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한 요제프는 그녀의 언니가 아닌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오스트리아 황후의 지위는 그녀에게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어렸던 그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 결혼이 그녀를 얼마나 불행하게 할지를.

 

 

[크기변환]시시.jpg

 

 

 

새장 속의 새처럼


 

그녀의 결혼생활은 고부갈등을 빼고서는 논하기 힘들 정도로 그녀와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조피 대공비는 어머니의 친언니로서, 그녀에게는 이모가 시어머니가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 조피 대공비는 여장부의 성격을 지녀 엄격하고 단호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조피 대공비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은, 조피 대공비의 남편인 프란츠 카를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증손주이기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란츠 카를의 고모이다. 유럽의 역사와 가족관계가 얼마나 얽혀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 사건. 이 일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얼마나 큰 충격에 빠졌을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대단했던 가문 중 하나로 이름을 떨친 합스부르크 가문이 여전히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을 사이에, 바로 옆의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실제로 왕과 왕비가 처형당하게 된 것을 보았을 때, 합스부르크 가문은 자신들의 궁정 체제도 조심하지 않으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으리라.

 

그래서였을까? 조피 대공비는 황궁의 규율에 엄격하게 따르도록 엘리자베트를 꾸짖었다. 그녀는 후계자 생산의 의무만을 강요받았고 그 외의 것들은 늘 철저히 감시당하고 제한당했다. 바이에른의 넓은 들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자유로운 소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화려한 감옥 속에서 그렇게 점점 시들어져 갔다.

 

 

 

아들의 자살


 

엘리자베트가 낳은 아이들은 늘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에게 빼앗겼다. 조피 대공비는 처음에는 그녀가 어리기에 아이를 돌볼 능력이 충분치 않다는 핑계로 그녀의 딸을 데려가 본인이 양육했다. 그녀는 점점 아이들에 대한 양육 의지를 상실해 나갔고 결국 엘리자베트의 모든 아이를 조피 대공비가 전적으로 도맡아 키우게 되었다. 후에 엘리자베트가 낳은 유일한 아들인 루돌프는 조피 대공비에게 엄격한 황태자 교육을 받았는데, 그 방식이 아이에게 하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하였다. 고작 7살에 불과한 소년이 아침마다 총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게 시키고, 홀로 외진 곳에서 왕궁까지 찾아오게 하는 등 거의 학대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부모님의 무관심과 할머니의 엄격한 양육 방식으로 점철된 유년기를 보낸 루돌프는 사랑하지 않는 여인과의 결혼생활까지 더해지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 이르렀고, 결국 30세에 연인과 함께 동반자살을 하며 삶을 끝맺는다.

 

 

 

암살당하다


 

1889년 1월 30일에 벌어진 아들의 죽음 이후 엘리자베트는 실의에 빠져, 늘 검은색 상복을 입고 여행을 다녔다. 그녀의 도피성 여행 기질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아들의 죽음 이후 더욱 극심해져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고 소수의 시녀와 함께하며 쉬지 않고 여행했다.

 

1898년 9월, 엘리자베트는 스위스를 여행하던 도중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에게 암살당한다. 그녀가 암살당한 도구는 가는 송곳으로, 범인은 그녀의 가슴에 송곳을 깊게 찌르고는 도망쳤는데, 당시 그녀가 코르셋을 착용하고 있던 탓에 바늘이 코르셋으로 인해 더 깊게 들어가지는 못한 채로 걸려있었고 그녀 또한 통증을 바로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늘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기에 출혈 또한 티가 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일과가 끝나고 돌아와 옷을 벗고 코르셋을 풀자마자 극심한 출혈이 시작되었다. 엘리자베트는 "내가 왜 이러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 그 이후


 

엘리자베트의 죽음 이후에도 역사는 쉴 새 없이 흘러갔다. 아내와 아들을 잃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황태자의 지위를 동생 카를에게 내렸지만 카를 또한 장티푸스로 사망한다. 결국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서 추정상속인의 상태에 놓였다. 페르디난트는 민족 자유적인 성향을 바탕으로 정책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유럽 전역을 휩쓴 민족주의 성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결국 이는 슬라브계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샀고, 1914년 보스니아의 중심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슬라브 민족주의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 조피가 암살당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라예보' 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란츠 요제프는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세르비아는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러시아가 도움을 주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같은 게르만족이자 동맹국인 독일이 도움을 주면서 전 유럽에 걸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근대에서 현대로


 

이렇듯 황후 엘리자베트의 삶은 유럽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던 거대한 변곡점 위에 놓여 있었다. 시민혁명의 메아리, 민족주의의 불씨, 그리고 다가오는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그녀의 시대를 온통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상상을 해 볼 수도 있다. 만약 엘리자베트의 아들이 죽지 않았더라면? 혹은 엘리자베트가 암살당하지 않아서 후에 프란츠 사이에 다른 아들이 더 생겼더라면? 그랬다면 프란츠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아서 독일이 패전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후의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끔찍한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기록인 역사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이라지만, 엘리자베트의 삶에는 자꾸만 '만약에~'를 붙이고 싶어진다. 소용돌이치던 격변의 시절에 어쩌면 그녀가 미칠 수도 있었을 영향력이 자꾸만 궁금해진다. 비운의 황후, 가장 아름다운 황후로 정의되는 엘리자베트가 아닌 또 다른 모습의 엘리자베트가.

 

 

 

에디터 태그.jpg

 

 

윤규리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삶은 모순이다. 그를 담아내는 것이 곧 예술이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