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생을 지탱하는 것에는 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삶의 방향키'가 되어주는 것은 그가 보고 자란 책 속, 어느 한 구절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새겨지는 것임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러한 의미를 가지는 도서가 있다. 바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간 머리 앤」이다.
앤의 '초록 지붕 집'의 모델이 된 실제 건물
우리나라에서는 1979년 방영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으로 그 제목이 '빨간 머리 앤'으로 익히 알려졌으나, 사실 본 작품의 명칭은 'Anne of Green Gables', 즉, '초록 지붕의 앤'이다. 심지어 이는 시리즈작 중 첫 번째 도서의 이름일 뿐, 그 이후로 이어지는 다음 작품들은 '에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 등 각기 다른 제목을 지녔다.
1908~1939 동안 총 8권으로 출간된 '앤 시리즈'는 어린 소녀였던 앤이 어엿한 숙녀로 자라고 후에는 한 가정의 엄마가 되어가는, 한 여성의 일생을 충실히 담아내었다. 소녀가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반짝이는 낙천적인 소녀가 삶을 힘차게 헤쳐나가는 이야기는 많은 소녀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이는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에게도 그러하였다.
'앤'의 화법
'앤'의 매력을 논하자면, 그녀만의 독특한 화법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감정 기복의 폭이 크지만서도, 종국에는 상상력과 낙천성으로 인해 긍정적인 기운으로 마무리되는 그녀만의 화법을 보고 있자면 가끔은 기가 차 헛웃음이 날 때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 긍정적임에 동화되어 기분 좋은 마무리가 이루어지곤 했다.
자신의 빨간 머리를 싫어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외모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이나, 귀족적이고 기품 있는 이름을 바라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허영심이 있는 모습들은 영락없는 10대 소녀였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이들과는 구별되는 그녀만의 천성이 있었다.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 있다.
앤은 책상을 열쇠로 잠그며 중얼거렸다.
"내 인생의 장(章)이 또 하나 닫혀지고 말았어."
슬픈 가운데에서도 '닫혀진 하나의 장'이라는 낭만적인 말에 얼마쯤 위안을 받았다.
개인적인 절망을 맛보는 순간에서도 방금 자신이 나지막이 내뱉은 말의 낭만성에 휩싸여 위로를 받는다니, 정말 '앤'스러운 구절이어서 책을 읽었던 당시에 헛웃음이 났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헛웃음이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부러움이 느껴졌다. 이런 성격이라면 정말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본래의 성격을 지키며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리고 그러한 성격은 어쩌면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앤'처럼 생각하기
앤 시리즈를 통틀어서, 그리고 나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1권에 나오는 '길모퉁이'에 대한 구절이다.
계획이 엄청 많아요 마릴라. 일주일 내내 그것만 생각한걸요. 여기서 최선을 다해서 살면 그만한 대가가 돌아올 거라 믿어요. 퀸스를 졸업했을 땐 제 미래가 곧은 길처럼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어요.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이정표를 보게 될 거라 생각했어요.
지금 전 길모퉁이에 서 있는 거예요.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믿을 거예요. 아주 멋진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요.
길모퉁이는 그 자체만으로 매혹적이잖아요, 마릴라. 길 너머 풍경이 어떨지 궁금해져요. 어떤 초록빛 영광과 부드럽고 다채로운 빛과 어둠이 있을지, 어떤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아름다움이 펼쳐질지, 멀리에선 어떤 굽잇길과 언덕과 골짜기로 이어질지...
본래 가고자 했던 인생의 길을 걷게 되지 못하게 된 앤은 이를 '포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 인생의 '모퉁이'를 돈다고 표현한다. 기존에 계획했던 인생은 '곧은 길'로써 예측되어 있었지만, 이제 자신은 매혹적인 인생의 '모퉁이'를 돌 것이며, 그 모퉁이야말로 다채롭고, 예측 불가능한 다양한 행복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처음 접했던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쭉-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늘 이 구절을 다시 집어 들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과 같이, 끝과 시작이 만나는 모서리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그 몇 번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늘 들었던 생각이 있다. 세상이 내 기대보다 작아진 미래를 선물로 주기도 한다는 차가운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에 품는 원대한 꿈인 '인생의 곧은 길'은 늘 보답받지는 않으며, 삶은 늘 굽이굽이 꺾이며 살게 되기 마련임을 체감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가 느낀 것은 오직 씁쓸함만은 아니었다. 모퉁이는 늘 미지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1권의 가장 마지막 구절에서, 서술자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한다.
퀸스에서 돌아와 창가에 앉았던 그날 밤 이후로 앤의 미래는 다소 좁아졌다.
하지만 앤은 자기 앞에 놓인 길이 좁다 해도 그 길을 따라 잔잔한 행복의 꽃들이 피어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심 어린 일과 값진 열망과 기분 좋은 친구가 있다는 기분은 온전히 앤의 것이었고, 타고난 상상력과 꿈으로 가득한 앤의 세계를 빼앗아 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 길에나 모퉁이가 있었다!
앤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안하네."
길이 좁아진들 어떠한가. 내 앞에 놓인 길에 얼마나 멋진 풍경이 놓일지는 온전히 나의 것인데.
변화는 불가항력이더라도, 내 손 닿는 길 위에 놓인 행복은 내가 찾아야 할 몫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인생은 직전의 모퉁이로 끝이 아니다. 늘 다음 모퉁이가 기다리고 있다. 그 모퉁이를 돌면 또 무엇이 있을지는 그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모퉁이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저 지금 걷고 있는 길 위의 순간들을 온전히 즐기자. 앤처럼 힘차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