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너무 많은 지식과 정보가 한꺼번에 밀려와, 머리가 한순간도 쉬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휴식을 위해무언가를 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택하는 콘텐츠는 오히려 더 강한 자극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진정한의미의 휴식보다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높여 오히려 피로를 가중시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작품이 있다. 바로 미국 드라마 <빨간 머리 앤(Anne with an ‘E’)>이다.
드라마 속 앤은 당차고 긍정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밝은 기운이 스며든다. 빌딩숲이 아닌 드넓은 초원 속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장면들은 보는 사람에게 대리적인 해방감과 안정감을 안겨준다. 빠르게 흘러가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고르게 해주는 것이다.
이 드라마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타샤의 기쁨>을 통해 다시금 떠올랐다.
안분지족의 삶
<빨간 머리 앤> 속 앤의 모습은 작가 타샤 튜더의 그림 속 세계와도 닮아 있다. 과도한 것을 욕심내기보다 일상의 소소한행복을 사랑하고, 자연과 동물, 그리고 꿈과 상상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앤은 게이블스 남매의 집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이 오해로 자신이 오게 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자연 풍경과 낡은 집조차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누군가에게는 초라하게 보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앤은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낸다. 이는 결국 같은 풍경이라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타샤 튜더가 그려낸 고양이와 강아지, 아이들, 그리고 환상적인 풍경 역시 단순한 묘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일상에서 마주한 장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안에서 느낀 아름다움, 경이로움, 그리고 행복의 감정을 담아 표현했다.
상상력의 힘
<타샤의 기쁨>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사람에게 사회가 필요하듯, 상상력에는 고독이 필요하다.
- 제임스 러셀 로웰, <문학 에세이> 중 '드라이든'
심리학에서 말하는 ‘고독(solitude)’은 '외로움(loneliness)'이나 '고립(isolation)'과는 다른 개념이다. 이는 혼자 있는 시간을 스스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하며, 반드시 부정적인 감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시간은 마음을 회복시키고 새로운 생각을 길어 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문구를 드라마 〈빨간머리 앤〉에 대입해 보면, 입양된 초반의 앤은 자신만의 상상 세계에 깊이 몰입해 있으며,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다소 이질적인 존재로 비춰진다. 사회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고독한 시간 속에서 앤의 풍부한 상상력과 기발한 생각들이 자라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타샤 튜더의 삶과 작품을 보고 있으면 또 다른 인물이 떠오른다. 바로 <피터 래빗>의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이다.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두 사람 모두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식물과 동물에 집중하며 살아갔다. 그리고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상상력을 펼쳐 자신만의 세계와 작품을 만들어냈다.
잘 산다는 것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선택의 갈림길이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더 행복할 것이라 믿는 방향을선택하며 살아간다.
드라마 속에서도 앤은 경제적인 어려움 앞에서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하고, 사랑과 학업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어떤 선택이 정말 최선이었는지는 결국 끝내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길을 살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중요한 것은 ‘완벽한 선택’을 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이, 그만이 행복하다. 진정으로 오늘을 살았기에 내일은 아무 가치 없으리라 말할 수 있는 이가 바로 행복한 사람. - 존 드라이든, <호레이쇼처럼>
이 순간이 영원이다. 나는 그 한가운데 있다. 햇살 속에 있는 나. 빛이 내리는 공기 중의 나비처럼 햇빛 속에 있는 나. 무엇도 필요치 않다. 이 순간이 바로 그것이니. 이 순간이 영이다. 지금이 영원한 삶이다. - 리처드 제프리스, <내 마음의 이야기>
마무리하며...
타샤 튜더는 책의 서문에서 이 책에는 특별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이행복했던 순간들을 기록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언가를 전하려 하지 않는 점’이 오히려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잠시 걱정과 고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좋아하던 미드 <빨간 머리 앤>의 장면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여행했던 힐 탑 (베아트릭스 포터의 집)의 풍경을 다시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타샤 튜더가 담아낸 평화로운 풍경 속에 내 모습을 넣어 보았기도 했다.
때로는 잠시 멈춰 서서 마음을 쉬게 해주는 풍경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있는 시간이 뇌에 휴식을 주듯,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을 때 이 책의 문장들과 그녀가 담아낸 그림들을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