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4년 7월 17일, 국민공회 정부 공안위원회의 명으로 체포된 콩피에뉴의 가르멜 수도원 소속 열여섯 명의 수녀들은 한 명 한 명 차례로 단두대에서 사라진다. 공포정치 종식 열흘 전에 벌어진 이 비극적인 사건은 독일 작가 게르트루트 폰 르포르의 <단두대의 최후 여인> (1931)이라는 서간체 역사소설로 앞서 형상화되었다.
베르나노스는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 위한 시나리오 대사 집필을 위촉받았고, 사후 평생의 후원자였던 평론가 알베르 베갱의 손질을 거쳐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라는 연극 형식의 대본으로 출간되었다. 연극 대본이기 때문에 대화와 특정 상황에 대한 묘사에 집중되어 있는데,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감각에서 오히려 그들의 상황이 더 직관적으로 와닿았다.
공포, 그리고 공포
후작: "아니 무슨 일로 죽었단 말이요?"
의사: "공포 때문입니다."
(p.8)
한 수녀 두려워 그러지요. 모두가 공포에 질렸어요. 페스트나 콜레라가 창궐한 시절마냥 그들은 서로를 두려워합니다.
다른 수녀 정말 수치스럽습니다!
블랑슈 수녀 사실 공포심도 질병인지 모르지요.
(p.142)
책은 공포에서 시작한다.
왕세자의 결혼 날, 폭죽 사고와 공포에 질린 군중들 사이에 있던 후작 부인은 공포 때문에 죽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난 딸, 블랑슈 들라포르스. 탄생의 비극 때문일까, 블랑슈는 한평생 공포 속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공포에 질리기도, 두려워하기도, 그리고 도망치기도 하는 블랑슈의 모습은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 또한 온갖 것에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주 사소한 일부터 피할 수 없는 일까지, 블랑슈처럼 온몸으로 공포를 체감하진 않아도 확실히 겁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공포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느끼는 블랑슈에게 이입이 많이 되었다. 공포심이 질병이라면 분명 불치병쯤 되리라.
개인적인 두려움을 넘어, 개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과 그 속에서 느끼게 되는 무력함과 공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만의 두려움조차 버거워 쩔쩔 매는 나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었다. 책 속 수녀들이 믿음과 숙명으로 순교 서원을 바치는 것을 보며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니, 공포에서 한발 멀어졌다가도 다시 되돌아가기를 반복할 뿐 어느 하나 쉽사리 선택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일까 순교를 쉽게 꺼내지 않는 새 원장의 모습이나 죽음을 무서워하는 수녀들의 존재는 위안이 되었다. 두려움과 공포를 지닌 채 살아도 된다는 것만 같아서.
그랬던 블랑슈마저 처형이 이뤄지는 광장으로 향하고 나니, 그 선택이 대견하다가도 나를 다잡게 된다. 사라지지 않을 공포심에 평생 쫓겨 다닐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갈 것인지는 오로지 각자의 몫으로 남을 뿐이기에.
죽음을 바라보다
블랑슈 다른 사람의 죽음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콩스탕스 자매?
콩스탕스 그건 그 다른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아주 수월하게 죽음을 감당할 수 있고, 죽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지면서 스스로 놀랄 거란 말입니다 (...) 사람은 각기 자기를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서로를 위해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 대신에 죽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 않아요?
(p.75)
원장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며 오랜 시간 종교에 몸 바친 사람에게도 죽음이란 또 다른 관문이구나 생각했다. 내 상상 속 종교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함을 유지하고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도 물러서기보다는 한 발자국 나아가는 사람이었기에, 종교를 넘어서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온한 죽음도, 그렇지 않은 죽음도 모두 각각의 의미가 있다는 시각은 굉장히 낯설게 다가왔다. 인간은 모두 평온한 죽음을 바라니까. 그렇지 않은 죽음이 일종의 '벌'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서 마저 타인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라니. 앞서 천주께 봉헌된 사람에 대해 "남에게 주는 것을 자기가 누릴 시간은 없는 법"이라 언급했던 것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경찰 관리 민중에게는 종이 필요 없소.
마리아 수녀 그러나 그들에게 순교자들은 대단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맡을 수 있는 섬김의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경찰 관리 흠! 지금과 같은 시대에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오.
마리아 수녀 그 말씀은 사실 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왜냐하면 목숨이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값어치가 떨어져 (...) 이제는 죽음밖에는 제값 나가는 것이 없게 되었으니까요.
(p.167)
"지금과 같은 시대에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오"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있었던 그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어쩌면 미래에도 이 말은 계속해서 성립되는 문장일지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죽음에 무감각해져 가는 걸 보면 삶의 무게도 그만큼 가벼워지고 있는 것일까. 순교 서원을 발함으로써 시대에 대항해야 한다고 말하던 그들과 현대의 '순교'를 행하고 있는 누군가들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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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읽으며 내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간 책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어렵게 느껴진 책이기도 했다. 종교와 어떠한 연결도 없이 살아온 나로서는 종교 용어와 더불어 그들의 행위에 깔려있는 종교적 사상 자체에 깊이 공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 책에 담긴 신앙과 영성을 미쳐 다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책이었다.
죽음에 대한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읽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