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나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같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일도 해야 하고, 시간도 봐야 하고, 오해도 풀어야 한다. 때로는 궁성도 떨고 미련도 갖는다.
![[정희]포스터0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4/20260427194735_ccppfgut.jpg)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게 참 힘이 듭니다. 때 되면 씻어야 하고, 때 되면 자야 하고.......
연극 <정희> 속 대사도 나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은 '정희네'라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정희가 밖에서 술을 마시고 가게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몸에 힘이 빠지지만 그는 빨래도 하고, 세수도 한다.
그러다 벽에서 물이 새며 정작 물이 나와야 하는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 등 가게 보수가 필요하다가는 것을 알게 된다. 정희는 가게를 그대로 두지 않고자 했고, 그의 친구 동훈이 소개해 준 '가람'이라는 청년이 등장해 고장 난 곳들을 고쳐 준다. 이 연극은 정희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가게도, 정희의 마음도 나아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정희에게는 동훈을 비롯한 마을 친구들이 있지만 그에게는 오래 전에 사랑했던 인물 '상원'이 있다. 상원은 정희와 사귀다 대뜸 스님이 되겠다며 절에 들어갔다. 학력고사 만점을 받았을 정도로 기대를 받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을 등지고 머리를 밀었다. 정희는 상원과 함께 하고 싶어 여러 차레 그를 찾아가 돌아오라고 했지만 이제 겸덕이 된 상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희의 "다 옆에 누가 있는데 나만 없어. 나만 혼자야."라는 대사는 그의 외로움을 관객 마음 깊숙하게 집어넣는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 방도 있도, 가게로도 쓰고, 2층도 따로 있는 그곳은 정희가 혼자 쓰기에는 너무 넓었다. 손님이 오고 친구들이 찾아오지만 그들과 나누는 정과 상원과의 정은 같을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정희는 가람의 주도 아래 가게 곳곳을 고쳐나간다. 변해가는 가게 모습 속에서도 정희는 몇 번씩 과거로 돌아간다. 그 기억들은 정희를 상원이 있는 절로 이끈다. 손에 라이터를 든 채로 "돌아가지 않으면 불태워버리겠다. 같이 죽자"고 말하는 정희를 상원은 돌아서 버렸다.
그런 정희에게 들어온 것은 지안이었다. 잠시 머물 곳을 찾고 있던 지안은 정희와 함께 살며 아침도 먹고 가게 개편 마무리 작업도 함께 한다.
특별한 점은 그렇게 여럿과 마음을 나누며 가게를 가꾸는 사이 정희도 전보다 자신을 가꾸었고, 그곳에 평생을 오지 않던 겸덕(상원)이 다녀간 것이다. 청년이 되어 떠난 겸덕은 중년이 되어 돌아와 이 가까운 곳은 왜 그토록 오지 못했을까, 하는 말을 남긴다.
<정희>는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정희의 삶에 들어오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떠나간 사랑이나 오래 있던 친구만이 아닌 커다라 창문, 비슷한 처지의 지안, 그가 새로움을 만들어주는 데 함께 하는 가람까지. 정희의 상처는 사람으로써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사람으로써 치유되는 과정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연극 <정희>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스핀오프 작품이다. 작 중 인물인 정희의 서사를 드라마보다 집요하게 쫓으며 그가 가진 이야기를 보여준다. 정희가 혼자 무게를 두는 추억이나 알 수 없이 남에게 보여주는 발랄함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은 우리가 지고 사는 삶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핵심 인물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드라마를 보며 지안만큼이나 마음이 갔던 인물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 좋았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계속 외롭고 고달플지 모른다. 때가 되면 씻고, 때가 되면 먹고, 때가 되면 자야 하는 삶이 그닥 재밌지 않을지 모른다. 사람으로 사는 삶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감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