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을 열며,
웨인 케스텐바움의 에세이집 『굴욕』은 2026년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되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케스텐바움은 시, 소설, 영화, 미술, 음악을 넘나들며 활동해 왔다. 그는 이 책에서 굴욕을 개인적이고 신체적이며 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규정한다. 굴욕의 필수조건은 더럽힘이며, 굴욕은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의 삼각관계를 전제한다. 그는 굴욕이 고갈되는 동시에 축적되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고 분석한다. 그의 핵심 비유는 굴욕을 더러운 안경에 빗댄 것이다. 이 안경은 세계를 굴욕의 색조로 필터링하고, 그 필터링은 몸의 표면에서 실현된다.
케스텐바움은 굴욕을 정체성의 토양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분석은 언어와 몸의 경계, 안과 밖의 뒤집힘, 매개를 통한 정체성 형성으로 확장된다. 이 개념들은 영상 장르인 바디호러와 교차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바디호러는 공포 장르의 하위 범주로서 몸의 변형, 분해, 오염, 융합을 해부학적으로 영상화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1986)와 〈비디오드롬〉(1983), 존 카펜터의 〈더 씽〉(1982)이 대표적이다. 바디호러는 정신적 공포를 심리적 차원에 두지 않고 해부학적 차원으로 밀어붙인다. 몸의 내부가 외부로 드러나고 외부가 내부로 침투하며, 자연과 기계가 융합한다. 이런 장르적 특성은 케스텐바움의 굴욕 개념과 구조적으로 겹친다.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서브스턴스〉(2024)는 이 장르를 현재의 맥락으로 끌어들인다. 한때 유명했던 할리우드 배우 엘리자베스는 방출된 뒤 서브스턴스라는 약물로 더 젊은 버전의 자신, 수를 뽑아낸다. 이 약물은 교대 규칙을 요구한다. 두 몸이 열흘 주기로 번갈아 활동해야 한다. 그러나 규칙은 깨지고, 두 몸은 서로를 소비하며 끝내 괴물로 융합된다. 이 영화는 굴욕의 구조를 해부학적으로 시각화하면서 동시에 그 구조를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이 글은 케스텐바움의 굴욕 개념을 렌즈 삼아 〈서브스턴스〉를 분석한다. 오염된 렌즈가 몸을 통과하는 방식, 더러움이 고갈과 축적 사이를 움직이는 방식, 안과 밖이 뒤섞이는 순간, 말이 실패한 자리에서 몸이 말하는 방식을 차례로 추적한다. 각 장면에서 굴욕의 삼각관계가 관객에게 어떻게 전이되는지를 중심에 놓는다. 목표는 비슷한 구조를 지적하는 데 있지 않다. 〈서브스턴스〉가 굴욕의 기계를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그 내부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데 있다.
# 오염된 렌즈
주차장에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거대한 광고판을 올려다본다. 광고판 속 얼굴은 젊고 단정하며 세련되게 보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실제 몸은 몇 시간 전 사고로 팔꿈치가 까지고 피가 맺혀 있다. 카메라는 먼저 광고판을 비추고, 그다음 상처 입은 팔로 내려온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세계가 엘리자베스를 보는 방식이 먼저 제시되고, 엘리자베스가 세계를 보는 몸은 그 뒤에야 드러난다. 주체는 자신을 보기도 전에 이미 대상의 자리를 점하고 있다.
케스텐바움은 굴욕을 더러운 안경에 비유한다. 이 안경은 착용자가 세계를 보는 도구일 뿐 아니라 세계가 착용자를 보는 필터로 작동한다. 오염된 렌즈는 착용자의 시야를 흐리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착용자를 흐릿하게 보이게 만든다. 광고판 위의 얼굴이 바로 그 오염된 렌즈다. 그 렌즈는 엘리자베스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을 넘어, 세계가 엘리자베스를 보는 방식을 강요한다. 주차장의 형광등 아래에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몸이 광고판의 얼굴과 일치하지 않음을 인식한다. 인식의 순간 굴욕이 실현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엘리자베스는 방송국 사장에게 방출 통보를 받는다. 사장은 단순히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언급할 뿐 엘리자베스의 나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엘리자베스의 목선과 주름에 머무는 순간, 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시선 자체가 굴욕의 문장을 완성한다. 케스텐바움이 굴욕의 필수조건으로 더럽힘을 제시한 것은 이 장면에서 구체화된다. 더럽힘은 언제나 신체적이다. 방출 통보는 말로 전달되지만 굴욕은 말 밖에서 일어난다.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를 구하러 가는 과정은 굴욕의 삼각관계를 재배열한다. 케스텐바움의 삼각관계는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로 구성된다. 엘리자베스는 피해자다. 그녀를 방출한 방송국은 가해자다. 그러나 극장 안의 관객은 단순한 목격자에 그치지 않는다. 케스텐바움은 읽는 행위만으로도 가해자의 자리에 놓이는 구조를 지적한 바 있다. 영화는 이 구조를 시각화한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광고판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관객은 자신이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식하게 된다. 거대한 광고판이라는 일방적 권력 장치는 본다는 행위를 곧 평가하는 행위로 전환시킨다. 그 의식의 순간 관객의 시선은 목격에서 감시로 옮겨 간다.
오염된 렌즈는 이중의 기능을 수행한다. 하나는 세계가 몸을 보는 방식을 굴욕의 색조로 변형하는 기능이다. 다른 하나는 몸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차단하는 기능이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상처 입은 팔을 보는 순간, 그녀는 이미 세계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녀는 팔의 상처를 자신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녀는 상처를 세계가 보는 대상으로 본다. 굴욕은 몸이 자신의 것을 잃는 순간에 실현된다.
# 더럽혀진 축적
서브스턴스를 주사한 뒤 엘리자베스의 몸은 쪼개진다. 등 뒤의 피부가 찢어지고, 등뼈 사이로 젊은 여성의 머리가 밀려 나온다. 이 장면은 출산이다. 그러나 이 출산은 생명의 탄생이 아니라 몸의 분열이다. 빨간 액체가 방바닥에 흥건히 고이고 점액질의 분비물이 몸을 타고 흐른다. 케스텐바움이 굴욕의 필수조건으로 제시한 더럽힘은 이 장면에서 극한에 도달한다.
더러움은 새로운 몸 위에 머무는 상태가 아니라 분열의 과정 자체다. 젊은 몸이 밀려 나오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몸은 죽지 않지만 살아 있지도 않은 상태로 남는다. 이것이 굴욕의 고갈이다. 케스텐바움은 굴욕을 고갈과 축적이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으로 본다. 엘리자베스가 고갈되는 만큼 수가 축적된다. 그러나 축적은 덧없다. 수는 열흘 후 다시 엘리자베스로 돌아가야 한다. 축적된 몸은 일시적이고, 그래서 반복된다.
반복의 사이에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출현한다. 수는 점차 엘리자베스의 습관과 특징을 띠게 된다. 손톱 아래의 흠, 말버릇, 몸짓. 이것은 단순한 기억의 잔해가 아니라 몸의 형태로 남은 굴욕의 흔적이다. 케스텐바움은 굴욕이 몸의 형태로 기억된다고 본다. 말은 잊히지만 몸은 잊지 않는다. 수가 엘리자베스 특유의 손동작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할 때, 그 몸은 이미 분열되기 전의 원래 주인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수의 몸을 넘어선다. 기억은 축적된 몸을 거쳐 원래의 몸으로 다시 흘러든다.
두 몸 사이의 축적과 고갈은 굴욕의 삼각관계를 내부로 끌어들인다. 엘리자베스는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다. 그녀는 피해당한 몸이지만 동시에 수를 창조한 주체다. 수는 엘리자베스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엘리자베스를 대체하는 위협이다. 목격자의 자리도 더 이상 외부에 있지 않다. 엘리자베스가 거울 앞에서 수를 바라볼 때, 그녀는 수의 굴욕을 목격하는 동시에 그 굴욕의 동조자가 된다.
더럽힘은 축적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 내부에 잔존한다.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를 반복할수록 그녀의 원래 몸은 쇠퇴한다. 그 쇠퇴는 단순한 노화가 아니다. 몸이 자신의 것이라는 인식이 무너져 가는 축적이다. 수의 몸이 아름다워질수록 엘리자베스의 몸은 고갈된다. 그러나 고갈은 거울을 통해서만 확인된다. 고갈된 몸은 자신의 고갈을 스스로 볼 수 없다. 오직 거울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고갈을 목격한다. 케스텐바움이 굴욕을 매개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정서로 본 것은 바로 이 거울의 구조를 가리킨다. 굴욕은 홀로 있는 몸이 아니라 보여지는 몸에서 일어난다.
# 안과 밖의 합성
수가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의 수는 젊다. 그러나 수는 젊음에 만족하지 않는다. 수는 엘리자베스가 퇴출당한 TV 쇼의 주인공 자리를 원한다. 그 자리는 젊음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가 몸을 보는 방식이다. 수는 세계의 시선을 내부로 끌어들여 몸의 표면에 새긴다. 이것이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무너지는 첫 번째 단계다.
영화 중반에서 수는 엘리자베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을 어긴다. 수는 더 오래 젊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 서브스턴스를 계속 주사한다. 그러나 규칙을 어길수록 엘리자베스의 몸은 쇠퇴한다. 쇠퇴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수의 몸 내부에서 시작되어 밖으로 드러난다. 수의 팔에 생긴 반점, 빠지는 머리카락, 굳어 가는 피부. 이것들은 수의 몸 안에 잠복해 있던 엘리자베스의 흔적이다. 안의 것이 밖으로 새어 나온다. 케스텐바움이 굴욕을 안과 밖이 접히는 과정으로 본 것은 이 장면의 이론적 구조다.
케스텐바움의 삼각관계는 이 접힘에서 내부화된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를 피해자로, 서로를 가해자로 본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몸을 빼앗기는 피해자다. 수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존재를 박탈하는 가해자라고 본다. 그러나 두 몸 사이에는 외부 목격자가 없다. 거울이 없으면 이 대립은 성립하지 않는다. 거울이 목격자의 자리를 대신한다. 엘리자베스가 거울 속의 수를 볼 때, 그녀는 수의 굴욕을 목격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수를 보는 시선 자체가 굴욕의 원인임을 안다. 그녀는 자신이 수를 만들었고 수가 자신을 대체했다는 사실을 동시에 목격한다.
영화는 이 삼각관계를 관객에게까지 전이시킨다. 카메라는 수가 거울을 보는 장면을 비춘 뒤, 카메라 자신이 거울이 되어 수의 얼굴을 비춘다. 이 이중 비춤에서 관객은 목격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영화는 이 자리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수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춤을 출 때 관객은 쾌감을 느낀다. 그 쾌감은 미학적 판단을 넘어선다. 수의 몸이 세계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동조다. 관객은 세계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그 시선을 수의 몸에 투영한다. 이 순간 목격자는 가해자의 동조자가 된다.
수가 무대 위에서 방송 사고를 일으키는 장면에서 이 동조는 깨진다. 수의 몸이 생방송 중에 이상 반응을 보이자 카메라는 당황한다. 감독의 외침이 들린다. 카메라는 수의 몸을 벗어나 감독을 비춘다. 그러나 관객의 시선은 이미 수의 몸에 고정되어 있다. 굴욕은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굴욕은 카메라가 비추어야만 실현된다. 카메라가 수를 비추는 순간 관객은 피해자의 시선에 동화되고, 카메라가 수를 비추지 않는 순간 관객은 가해자의 자리로 옮겨 간다. 이 전환의 속도가 영화의 굴욕 장치다.
안과 밖의 합성은 마지막 장면에서 극단에 도달한다. 수가 자신을 살해하려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비명 속에서 두 몸이 한 몸으로 뒤엉킨다. 그 결과물은 더 이상 엘리자베스도 수도 아니다. 그것은 몬스터다. 몬스터의 몸은 수의 젊은 얼굴과 엘리자베스의 주름진 몸이 이어 붙은 형상이다. 젊음과 노화가 한 몸 위에 공존한다. 청결과 더러움이 한 표면 위에 겹친다. 이 장면에서 안과 밖은 완전히 뒤집힌다. 안의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넘어, 안과 밖이 동시에 실존한다. 더 이상 경계가 없다. 케스텐바움이 말한 굴욕의 토양에서 발아한 정체성이 바로 이 몬스터의 몸이다.
# 말을 잃는 몸들
몬스터가 무대 위에 선다. 쇼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가운데, 그것은 마이크를 잡는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혀는 비정상적으로 길어졌고, 턱은 굳었으며, 성대는 점액에 잠겨 있다. 그것이 내뱉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웅크린 소리다. 관객은 그것을 향해 야유를 던진다. 이것이 말의 실패다.
케스텐바움은 굴욕을 언어의 실패와 연결한다. 굴욕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굴욕이 몸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몸의 굴욕은 말로 전달되는 순간 이미 왜곡된다. 말은 굴욕을 중재하고, 중재는 굴욕을 희석한다. 케스텐바움이 앙토냉 아르토를 끌어들인 것은 이 지점에서다. 아르토는 정신병원에 갇혀 언어를 박탈당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몸을 글로 쓸 수 있었다. 말의 실패가 글쓰기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몬스터는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은 글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몸만 남는다. 몸은 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몸의 말은 언어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으르렁거림과 비틀림과 점액이 몸의 어휘다. 몬스터가 관객을 향해 손을 뻗을 때, 그 손은 엘리자베스의 주름진 손이다. 그 손이 관객에게 닿으려 할 때 관객은 뒤로 물러선다. 물러서는 행위가 관객의 답이다. 관객은 말로 답하지 않는다. 관객의 몸이 말한다.
엘리자베스가 죽은 자리에 남은 것은 육체 조각이다. 잘린 다리, 찢긴 배, 떨어진 눈알. 이것들은 말이 실패한 뒤에 남은 잔해다. 케스텐바움은 굴욕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고 보았다. 이 잔해가 그 흔적이다. 잔해는 몬스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몬스터의 남은 부분이다. 다시 말해, 잔해는 몬스터가 말할 수 없는 것의 증거다. 몸이 자기 내부를 드러내고, 그 드러냄이 말의 잔해가 된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관객을 굴욕의 삼각관계 안에 가두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몬스터가 무대 위에 선 장면에서 카메라는 객석을 비춘다. 그러나 객석에 앉아 있는 것은 영화관 안의 관객이기도 하다. 영화 안의 관객은 쇼를 보러 온 사람들이고, 영화 밖의 관객은 극장에 앉아 이 장면을 보는 사람들이다. 두 관객이 겹쳐진다. 카메라는 영화 안의 관객을 비추지만, 영화 밖의 관객은 그 비춤 자체를 보고 있다. 이것이 케스텐바움이 말한 목격자의 중첩이다. 목격자는 가해자가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몬스터가 죽는 순간 관객은 해방감을 느낀다. 그 해방감이 굴욕을 소비한 뒤의 잔여물이다.
말이 실패하는 자리에서 몸이 말한다는 것은 단순한 대체가 아니다. 몸의 말은 언어의 말과 다른 문법을 가진다. 케스텐바움이 제시한 굴욕의 삼각관계는 여기서 최종 형태에 이른다. 피해자는 죽은 몬스터다. 가해자는 서브스턴스를 개발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목격자는 관객이다. 관객은 무대 위에서 벌어진 굴욕을 보고, 그 굴욕을 쾌감으로 소비한 뒤, 해방감으로 마무리한다. 영화는 이 과정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이 굴욕의 미학이다.
# 글을 마치며,
굴욕의 안경은 여전히 착용된 상태다. 영화는 끝났지만 렌즈는 관객의 눈에 남는다. 〈서브스턴스〉는 엘리자베스의 몸이 굴욕당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의 몸이 그 굴욕에 참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관객은 극장에 앉아 무대 위의 몬스터를 본다. 그러나 카메라는 무대 위의 관객도 비춘다. 영화 안의 관객은 소리를 지른다. 영화 밖의 관객은 숨을 삼킨다. 이 숨김이 굴욕의 행위다. 영화 밖의 관객은 영화 안의 관객을 보고, 그 보는 행위 자체가 굴욕에 포함된다.
오염된 렌즈, 더럽혀진 축적, 안과 밖의 합성, 말 잃는 몸. 이 네 장면은 〈서브스턴스〉가 굴욕의 삼각구조를 관객에게 전이시키는 순서다. 굴욕의 삼각관계는 엘리자베스와 수와 몬스터 사이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와 관객과 카메라 사이의 문제다. 영화가 굴욕을 보여줄 때 관객은 목격자다. 관객이 굴욕을 지속적으로 볼 때 관객은 가해자의 자리에 들어선다. 관객이 영화관을 나설 때, 그 안경은 벗겨지지 않는다.
케스텐바움은 굴욕의 토양에서 정체성이 발아한다고 보았다. 그의 토양은 시간을 가로지른다. 어린 시절의 굴욕이 성인기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서브스턴스〉의 토양은 공간을 가로지른다.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수의 몸으로, 수의 몸에서 몬스터의 몸으로. 이 이동은 굴욕의 축적이라는 형식을 넘어 굴욕의 이동이다. 굴욕은 몸 사이를 이동하면서 점점 더 많은 몸을 감염시킨다. 관객의 몸은 그 마지막 목적지다.
케스텐바움이 말한 굴욕의 가장자리는 이렇게 확장된다. 우리가 굴욕의 나라로 추방당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나라의 경계가 흐려졌다. 영상기술의 발달은 굴욕의 장소를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스크린에서 관객의 몸으로 옮겨 왔다. 굴욕의 나라는 지정된 장소에 갇히지 않는다. 굴욕의 나라는 그 안경을 쓴 모든 몸이 사는 곳이다.
영화는 말의 실패라는 현장을 넘어 잔해의 현장에 이른다. 몬스터의 육체 조각은 무대 위에 흩어져 있다. 카메라는 한 조각을 비춘다. 그 조각이 관객 쪽으로 움직인다. 이 움직임이 영화의 마지막 굴욕이다. 관객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굴욕당한 몸의 잔해를 향하게 된다. 그 향함이 굴욕의 연대다. 우리는 같은 안경을 쓰지 않았지만 같은 렌즈를 공유한다. 그리고 그 렌즈는 굴욕의 색조만을 투과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