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이라는 단어가 아우르는 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약자가 겪는 모욕과 폭력의 역사부터 밤이면 이불을 발로 차게 만드는 학교의 수치스러운 사건, 이미 모든 걸 대중에게 보여준 스타가 억지로 내놓은 사생활. 경우와 정도를 막론하고 굴욕의 모습이 너무나 다양해서, 굴욕이 마치 인생의 무게를 더하는 추이자 삶 자체를 뜻하는 것만 같다.
웨인 케스텐바움의 <굴욕>은 어려운 책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매우. 무작위의 단상, 의도적으로 엮은 양극단의 사례들을 하나의 통찰로 설명하는 까다로운 시도들, 자신의 사례를 진솔하다 못해 이렇게까지 전부 말해도 될까? 싶게 낱낱이 이야기하는 작업을 보자면, 그래서 그 굴욕이란 게 대체 뭐냐 하는 아리송한 마음이 든다. 안과 밖을 뒤집어 놓아 평생의 수치를 느끼게도, 평화를 찾게 만들기도 하는 굴욕이란 감정에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굴욕이란 인격의 지하실인 것 같고 계단 밑에 쌓아둔 쓰레기 더미인 것 같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굴욕이란 '자아'의 자기인식을 위한 길을 내는 선행 사건이다."
그는 굴욕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굴욕은 개인적이고 신체적이며, 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라는 삼각관계를 전제로 하며,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굴욕은 괴로움, 취약함, 욕구와 같은 사적 차원을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공적 차원으로 끌어냄으로써 안과 밖이 뒤집히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굴욕을 통해 누군가는 평화(혹온 고통의 중지)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굴욕적 상황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지만, 타인의 굴욕을 목격함으로써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부끄러운 목격자가 될 수도 있고, 직접 가해하거나 혹은 그 굴욕을 보는 것 그 자체로 가해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 모두가 모두가 될 수 있는 이 이상한 굴욕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는 일상적 관계 같다.
경계를 비집는 굴욕에 대해, 작가는 수치보다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공적 차원으로 강제로 끌어내지는 밑바닥의 경험은 결국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안과 밖이 뒤집힌다면, 굴욕을 평화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수과정은 "받아들이기"다. 바스키아나 아르토와 같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굴욕의 주체가 되어 그것을 받아들이고 승화시키는 과정을 통하는 것이다. 언어는 권위적이고 처벌적이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 권위와 처벌적 위상을 비웃듯 난잡해지고, 선으로 그어지고, 태워지고, 장난스러워지고, 마구잡이로 요동치며 작품이 되었다.
부끄러움과 굴욕은 다르다고 작가는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 둘을 거의 동일시하며 살았다. 그리고 내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굴욕의 순간마다 눈감고 포기하는 내가 아니라 인정하고 넘어가는 내가 있었던 것 같다. 한국인 패치가 들어간다면 이런 식의 이야기다. 나는 영어를 못해서 20점을 맞았던 적이 있고, 학원에선 손바닥 맞기가 죽기보다도 싫어 친구와 작당모의를 했다. 입이 가벼운 친구는 그대로 선생님께 달려가 "얘가 컨닝하자고 해요!"라고 외쳤고, 나는 그 순간 발가벗겨진 것같은 부끄러움/굴욕을 느꼈다. 나는 그 후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런 고자질을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남들보다 뒤쳐지고 있다는 그 지옥 같은 2030의 마음속 고난에서, SNS는 나의 가해자요 친구들은 내 밑바닥의 목격자가 된다. 나는 괜찮다고 자신을 위로하느니 스스로가 지금 저 아래 박혀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한다. 외려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그러므로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고, 마음껏 걱정하면서 우는소리 할 수 있다. 그러면 속이 뻥 뚫린다.
케스텐바움의 굴욕 사례들은 이런 어정쩡한 이야기들을 잘 내놓지 않는다. 주로 성적/사생활적으로 적나라한 사례와 극악무도한 역사의 윤리 범죄들을 번갈아 이야기하다 보니, 굴욕이라는 거대한 틀을 아주 세밀하거나 아주 장황하게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좀 더 공감하기 위해서, 내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물론, 평화로의 길목이 되는 굴욕만 있지는 않다. 어떤 굴욕은 자아 자체를 없애버린다. 권력에 희생되고, 관습에 의해 희생되고, 시대에 휩쓸려 희생된 그 많은 이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에겐 시체마저 전시되는 영원한 지옥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 비극에서 그들은 어떤 위안이나마 얻을 수 있었을까? 이렇게 보면, 내가 겪은 게 굴욕이 맞나 싶다. 겨우 한 단어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해도 되는지, 겨우 철학적이자고 뿌리를 찾아서 가지만 정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좀 더 발전된 논의를 위해서는 굴욕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 슬픔의 5단계 이론처럼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려운 책이다. 내가 잘 이해하고 있긴 한지 얼굴을 찌푸리면서 책장을 넘긴 적이 몇 번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명확한 논지의 글, 재미있는 소재, 참신한 문장들이 몇 번이고 등장하는 책이기도 하다.
책의 표지를 본다. 불쾌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피핑 톰(Peeping Tom)의 구멍을. 굴욕당한 인간을 볼 수도, 굴욕당한 인간이 될 수도 있는 그 구멍을.
이해 못하는 것도 굴욕, 이해하는 것도 굴욕이라면, 케스텐바움의 이야기는 잘 전달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