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위키드> 공연을 봤던 대학생 시절에도 소름이 돋지는 않았다.
배우가 연기를 못했다거나, 음악이 인상 깊지 않아서 등의 이유가 아니다. 말이 되나, 그 브로드웨이에서! 함께 여행을 떠났던 친구는 그 공연을 보며 울었다. 그러니 내가 감동을 받거나, 어떤 것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는 점을 먼저 말해두고 싶다.
<지킬 앤 하이드> 공연의 감상문에서 대체 왜 이런 예시를 들었느냐 하면, 당연히 내가 이 공연에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1부가 끝나고 동행인을 돌아보며,
"뭐야?"
라고 외쳤을 만큼이다.
나는 정말, 뮤지컬 배우들을 잘 모른다. 1년에 몇 번 기회가 닿아 보러 가긴 하지만 이 분야에 남다른 애정을 가져서는 아니다. 다방면으로 문화생활을 즐기고자 하는데 가장 큰 방점을 찍는데, <지킬 앤 하이드>도 같은 경우다. 마침 뮤지컬에 관심이 많은 동행인이 표를 구해왔고, 나는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인 만큼 기회를 냉큼 잡았다. 유난히 국내 유명인의 이름을 몰라, '홍광호'라는 배우가 미친 연기로 그렇게 유명하며 그의 공연은 뒷자리를 구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사실 또한 알 리가 없었다.
적당한 재미를 생각했다. 놀랍다는 감정을 현장감 있는 문화 콘텐츠에서 자주 느끼지 못했으니, 다년의 경력자들이 만들어낸 세트와 스토리를 잠깐 즐기고 주말을 뿌듯하게 보냈구나 하는 정도의 재미를 바랐다. 공연의 초중반까진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지킬 박사가 그 유명한 '지금 이 순간'을 부를 때까지도,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 바로 뒤. 연구가 실패하고, 하이드가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공연장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맹수가 공연장에 들어온 듯한 숨소리와 어두컴컴하고 강렬한 웃음, 그리고 천장이 뚫린 것처럼 내려꽂힌 천둥번개.
홍광호 배우가 보여주는 지킬박사의 어두운 면에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가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영화 <검은 사제들>의 박소담 배우의 연기가 얼핏 생각이 났다. 좁은 공간에서 극의 하이라이트가 몇십분이 진행되는데도 지루하기는커녕 놀랍기만 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지킬 앤 하이드>에서 홍광호 배우가 보여준 연기도 그랬다. 저렇게 단숨에 숨소리마저 바뀔 수 있다고? 한 마디, 한 마디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스토리가 주는 재미가 공연의 전부는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배우의 연기가, 또 누군가에겐 연출이, 또 누군가에겐 스윙과 악단이 극을 완성하는 키가 될 수 있다.
<지킬 앤 하이드>는 고딕 향기가 물씬 풍기는 오래된 작품인 만큼 지루한 감이 있다. 가령 고뇌하는 주인공의 독백이 길고, 유머는 드물다.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는 강력한 한방이 필요한 뮤지컬인데, 덕분에 가장 큰 요소는 배우의 연기일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조금은 딴 생각을 하고있던 관객들을 휘어잡아 제자리에 앉혀 놓는 역할. 그 핵심 역할의 배우가, 잘하는 것을 넘어 소름이 돋을 정도의 타수로 매 공연을 마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거의 경외감이 들었다. 연기는 스펙트럼이라지만, 이런 연기를 과연 각자의 입맛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무언가로 평할 수 있을까?
물론, 다른 배우들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홍광호 배우가 이중인격을 소화해 내는 동안, 그와 합을 맞추는 모든 배우도 압도적인 연기를 보였다. 루시 역을 맡은 아이비 배우의 에너지가 하이드를 소화 중인 홍광호 배우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던 것, 지킬 박사의 실험을 반대하고 또 조롱하던 이사회의 넘버는 나까지도 비참하게 만들 정도였다.
좋은 공연을 보면 꼭 하는 생각이 있다. 미디어가 '촬영한' 현장은 언제까지고 진짜 현장의 느낌을 전혀 따라갈 수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이다. 공기까지 다른 그 느낌. 공연장 전체가 전율하고 있을 거라는 그 확신. 비단 감탄 나오는 연기뿐이 아니다. 실제로 무언가를 보러 가는 행위를 통해 얻는 경험은 TV를 통해 얻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대, 관객과 내적으로 소통하며 얻는 즐거움도 있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새롭게 탄생하거나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진귀한 공연은 티켓 가격과 희소성이 아닌 나의 감정과 경험으로 결정된다. <지킬 앤 하이드>는 물론, 운이 좋았던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보다도 내게 뮤지컬을 보는 재미를 하나 더 알려줬다는 점에서 더욱 즐거운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