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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공간의 점유에 대하여 - '브루탈리스트'와 '트랜짓', 그리고 '치뽈라' [공간]

무너지는 공간과 흩어지는 기억 사이에서 건져 올린 ‘순간’의 기록

by 서지민 에디터
2026.04.23 16:49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가 허상처럼 느껴지는 시대다. ‘집’이 가리키는 것이 물리적인 거주 공간인지, 자산 가치로서의 부동산인지, 혹은 영혼의 안식처인지 이제는 누구도 확언하지 못한다. 설령 집을 무엇으로 규정하든, 그것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사실만은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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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대규모 재개발이 진행 중인 곳에 살고 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사는 곳을 제외한 주변의 거대한 주택단지가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었고, 공사장으로 둘러싸인 환경에 익숙해진 지도 어느덧 3년이 넘었다. 처음 우리 집을 방문했던 친구는 아파트 주변을 바라보며 마치 디스토피아 영화 속 한 장면 같다고 했다. 높게 쳐진 하얀 펜스 위로 하늘이 간신히 보이는 기괴한 풍경도 시간이 흐르며 점차 일상이 되었다. 집 앞을 가로지르는 포크레인, 코를 찌르는 시멘트 냄새, 배경음악처럼 깔리는 공사 소음이 익숙해진다는 사실은 삶에 묘한 위화감을 주었다. 동생과 나는 “이러다 우리 집도 함께 무너져서 새로 지어줬으면 좋겠다”라는 섬뜩한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낡은 우리집이 허물어진대도 아쉬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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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펜스가 걷히고 건물들이 높게 올라왔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도 익숙해졌다. 등굣길에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대화 사이를 스치다 보면, 이 공간의 주인은 나였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진다. 이 공간에 진정으로 사는 게 누구냐는 질문이 이어지며, 직접 집을 쌓아 올리는 행위에 대해 생각한다. 정작 벽돌을 쌓는 저들의 손 중, 과열된 가격의 이 새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반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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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쯤 영화 '브루탈리스트'를 보았다.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계 건축가의 생애를 다룬 이 영화는 여러 시상식에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특히 팔레스타인 참사가 이어지는 현시점에서, 영화가 시오니즘을 다루는 방식이 우호적인지 혹은 풍자인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다. 영화를 함께 본 B와 나는 이 영화가 시오니즘에 대해 명백한 조소의 태도를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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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끊임없이 ‘존립할 자리’를 박탈당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 이미지로 시작되는 오프닝은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의 슬로건을 비웃으며 포문을 연다. 주인공인 유대인 라즐로는 나치에 의해 자신의 건축 미학도, 가족도 모두 유린당했다. 그는 유대식 이름을 버리고 미국식 이름으로 가구점을 운영하는 사촌의 집에 얹혀살다 버림받고, 자본주의적 미국 체제를 의인화한 듯한 해리슨 가족을 위해 서재를 짓지만 끝내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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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당한 이들이 모인 부역장에서 라즐로는 해리슨으로부터 다시 교회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가족과 재회하지만, 약탈은 멈추지 않는다. 아내는 전쟁의 여파로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고, 조카는 해리슨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건물을 짓는 과정을 온전히 소유하고자 했던 라즐로의 욕망은 끊임없이 좌절된다. 해리슨은 라즐로의 건축 미학은 수용하면서도, 폭력을 통해 그의 인격을 짓누르려 한다. 시오니스트가 된 조카를 이스라엘에서 잃고 해리슨에게 남편마저 잃은 아내는, 고열에 시달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절규한다. 그녀가 갈구하는 집이 메시아의 땅인지, 혹은 타인의 터전을 부수고 세워진 허상으로서의 이스라엘인지 영화는 명시하지 않는다. 다만 아내의 힘없는 외침은 흩어지고, 라즐로의 미학을 파괴하는 듯한 조악한 화면 효과와 함께 영화는 현대 시퀀스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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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 앉아 입이 비뚤어진 채 함묵하는 노년의 라즐로와 대조적으로, 현대의 시온주의자인 그의 손녀는 할아버지의 건축물이 지닌 신앙적·정치적 메시지를 역설한다. 정작 창조자인 라즐로는 발언권을 잃었으며, 그의 비뚤어진 입 모양처럼 뒤틀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공들여 지은 교회는 더 이상 만든 자를 기억하지도, 대변하지도 않는다. 자본을 댄 자도, 공사에 참여한 자도, 입맛대로 해석을 덧붙이는 손녀조차 건물의 본질을 증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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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2년 반 동안 파트타임으로 근무했던 공간이 폐업한다. 15년간 자리를 지켰던 가게는 이제 철거되어 대기업 꽃집이 될 예정이다. 사장님은 가게 곳곳을 바라보며 그간의 세월을 소개했다. 직접 고른 타일의 결, 조명의 디자인, 목재로 이루어진 벽까지—공간의 구석구석에 사장님이 ‘치뽈라’를 세우기 위해 들인 시간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임대 계약 안에서는 사장님이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건물의 주인은 따로 있고, 새로 들어올 사람도 따로 있다. 식당 ‘치뽈라’는 그렇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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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간, 나의 집을 소유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집을 사들인 부자가 덜 가진 자들에게 세를 놓을 때, 대체 그들 중 누가 집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집에 살지 않아 삶의 궤적을 알지 못하는 이와, 그 공간에 때를 묻히며 살아가는 이 중 누가 진정한 소유자일까. 벽돌을 쌓고 벽을 재단한 노동자를 공간은 기억해 줄까. 공간을 기억하는 자와 공간을 결정하는 자가 일치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욕망 때문에 싸우고 사라진다. 내 것이 아니길 바라는 기억만이 내 것으로 불리는 역사가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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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주인과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 분리되어 온 역사를 되짚어 본다. 만리장성을 짓다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옛 중국 노래부터, 신을 위해 지어진 웅장한 성전까지, 수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어 나갔으나 그곳에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직접 지은 것을 온전히 소유하는 삶은 가능한가. 자식조차 결국 자신의 인생을 살고 세상의 것이 되며, 종국에는 죽음의 소유가 된다. 모든 삶은 조각나다 죽음에 잠식된다. 내가 무언가를 ‘가졌다’라고 믿는 순간은 그 과정 어딘가에서 끝이 난다. 소유는 허상이다. 영화를 만들어도 그것은 내 손을 떠나 누군가의 기억과 상처, 혹은 웃음으로 흩어진다. 세상에 완전히 내 것인 것은 없고 파편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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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 '트랜짓'은 시대를 불분명하게 설정하여 모두가 도망자이고 모든 장소가 경유지인 세계를 묘사한다. 대체 가능성과 불가능성, 기다림과 떠남의 경계를 허무는 이 영화는 소유에 대한 갈망에 초월적인 태도를 취한다. 공간만이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만남과 이별을 마치 정거장을 경유하는 것처럼 그린다. 누가 누구로부터 도망친 것인지, 어디가 종착지인지 알 수 없다.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경유지가 될 뿐이다. 정박하려 할 때마다 우리는 사회에 의해 유린당한다. 사랑해서 남으려 하면 단속국이 쫓아오고, 사랑해서 쫓아가려 하면 상대가 남기로 한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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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속에서 애착은 존재했다. 어디에 정박해 있는지 몰라 주소를 적을 수는 없으나, 그 마음은 분명 그 자리에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라즐로의 건물을 보고 아내는 "꼭 당신을 닮았다"라고 말했고. 그 장면에서 방 안에 드리우던 따스한 햇살과 라즐로의 이해 받은 듯한 표정은 잔상으로 남았다. 해리슨의 서재가 완성되었을 때, 그 중심에 서서 공간을 감상하던 라즐로는 분명 그 순간을 소유했다. '트랜짓' 속 드리스는 게오르그가 사준 아이스크림의 맛을 기억하고, 마리는 모두가 떠나고 남겨진 곳에서 끊임없이 바이델을 찾으며 애정으로 움직인다. '치뽈라'에서 친구와 사장님과 대화하며 웃었던 기억 또한 나와 남는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우리는 아무것도 온전히 가지지 못하겠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혹은 공간에 머물렀던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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