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쇼펜하우어의 인생은 소망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 오히려 소망했기에 정반대로 고통이 부과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습니다. 

 

그의 젊은 날은 사랑했기에 여인들로부터 상처받아야 했고, 지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세상의 혐오에 시달렸으며,

 

사람들에게 상식과 정의를 요구할 때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야 했습니다.

 

     
 

희망이 아닌 절망


 
우리는 세상의 모순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인지할 수 있는가, 순환하는 삶에 몸을 자연스럽게 맡기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뜻대로 펼쳐지지 않는 오답과도 같은 삶에 저항하고 있는가. 쇼펜하우어를 이루는 생각의 중심축은 몹시 염세적이어서 자신도 모르는 새 반발심이 모락거리기 시작한다.
 
왜 인간은 의당하다듯 희망을 강조하고, 절망과 좌절을 버리고 빛이 스며드는 밝은 곳으로 나아감을 굳게 내세우는 것일까, 희망이 중요한 절대적 가치임을 우리는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뇌 속에 집어넣도록 교육받는다. 교육받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인간은 희망을 좇으려 애쓴다. 우울감이라는 진흙탕을 몸에 뒤집어쓴 인간은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넘어진 채로 고립을 선택하고 타들어 가는 대로 죽음이라는 안식을 기다린다.
 
쇼펜하우어는 희망을 바라지 않았다. 행복이 아닌 절망에서 삶의 답을 찾고자 했다. 인간은 모두’ 죽음’이라는 최종의 막을 맞이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점과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상태임을 역설하였지만 1만 페이지가 넘는 일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작성하였으며 괴테를 비롯한 수많은 동시대 사람과 편지를 매개로 사색을 나누었다.
 
그는 무엇보다 삶에 진심이었다. 삶을 위한 삶, 무조건적인 죽음이라는 흐름을 막을 수 없는 삶을 혐오하고 어린 시절부터 보편적으로 정의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매 순간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닌, 사람을 위한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의 고통을 철학이라는 끝없는 학문으로 승화하려 했다.
 
번뇌로 가득 찬 무거운 머리를 달고 썰물처럼 밀려오는 죄악과도 같은 생의 파도에 몸을 마구 휩쓸리게 두며 그럼에도 진심으로, 끄나풀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삶을 탐문하려 하는 그의 비상함과 인격에 동조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삶에 감동하며 한 줄 한 줄을 깊이 기억하려 공을 들인다. 하루라도 빨리 그의 사상을 심장에 새길 수 있음에 스스로에게 감사하다.
 
 
나이가 들고부터는 무엇을 봐도 예전처럼 흥미가 일어나지 않는다. 재미난 사건을 목격해도 누군가에게 달려가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나지 않는다. 어느새 내 안에서 열정이 사라졌다.

아름다운 얼굴도 세월이 가면 표정이 추해지고, 불붙은 열정은 한 번의 실패에 끝없는 좌절로 바뀐다. 신에게 평생을 귀의하겠다던 사제들의 결심도 유혹과 물질에 하잘것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구원에 대한 갈망조차 인간을 잡아두지 못하는데, 세상만사 그 무엇이 나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지 또 한 번 비웃음만 나온다.

천지간에 흥망은 시간의 장난질을 감당하지 못한다. 영웅도, 국가도 시간 앞에 무력하다. 세월은 모든 것을 녹이는 거대한 용광로처럼 우리의 삶을 조금씩 녹여 이름 없는 대지에 부어버린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실재하는 낙원을 거닐어본 적이 없음에도 어딘가에(혹은 죽은 뒤에라도) 낙원이 실재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 믿음에 기대어 이 비참한 시간과 맞서 싸워보지만, 막상 기대했던 낙원의 구성 요소들이 모두 채워진 환경이 주어지면 인간은 또 다른 요구 조건을 내세워 그곳을 피로 물든 전쟁터로 변모시키고, 새롭게 낙원을 개척하려 한다.
 
 
 

낙원


 
어린아이는 과도한 환상에 푹 잠기곤 한다. 아이는 인류 보편적으로 행복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결말을 다룬 다양한 종류의 동화를 읽는데, 이는 아이에게 교훈을 담은 유토피아를 동경하는 행위가 세대를 불문하고 권장되기 때문인 듯하다.
 
공주님과 왕자님을 괴롭히는 악당은 파멸의 길로 영영 사라지고 주인공인 둘은 여생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는 부류의 환상 동화는 고통보다 초조와 흥분이 주축을 이루는 쾌락을 상기하는 아이들의 기대를 맘껏 부풀리게 하고 심신에 안정을 불러오는 데 매우 적합한 결말이었다. 도덕적 품성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어린아이에게 있어 선을 칭송하고 악을 벌하는 권선징악이란 필수 불가결인 숙명의 이정표와도 같다.
 
아름다운 결말을 이루는 작품의 감상을 끝마치면 어린 시절의 나는 이에 쉽게 감화되어 그들의 행복을 좇으려 하고 동화 속 주인공은 나의 귀감이 되어 바른 생활이라는 ‘선’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럼에도 어느샌가 답답함과 회한이 밀려옴을 느꼈다.
 
그들의 행복한 결말이 나에게 있어 인격의 성장이라는 긍정적 영감을 주기는커녕 개운치 못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왜 저들은 더 이상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거지? 아직 세상은 불완전한 것투성이이며, 실상 현실 세계 인간의 곁에는 불안이라는 부정적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데… 나는 해피 엔딩의 작품을 접하면 쉽게 고집불통의 불평분자가 되고는 했다.
 
의문이 들었다. 왜 인간이라는 동물은 행복에 이토록 열광하는가, 천국이라 칭하는 아직 접하지 못했고 닿을 수조차 없을지 모르는 낙관적 무대를 염원하며 잘못을 없애고 선행을 베푸는 데 온갖 힘과 정신을 동원한다. 이분법적으로 지옥과 천국을 나누고 아름다움과 세상 이치를 풀어내는 절대자에 귀의하여 고통이라는 감정을 완벽히 잊을 수 있게 되는 낙원을 꿈꾸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간다.
 
해결할 수 없는 고뇌에 맞닥뜨렸을 때 판도라의 상자를 떠올렸다. 현실 세계에 불행이라는 재앙이 확산되지 않았더라면… 허황된 꿈을 꾸곤 했다. 어린 시절의 영향 때문인지 쉽게 동화 같은 결말을 바랐다, 이러한 상상을 멈추는 것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재해를 막으라는 분부를 받은 것처럼 매우 곤란한 지시였다.
 
동화는 동화였다. 인간이 구상하고 제작하였기 때문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나듯, 현실에 이러한 낭만적 줄거리를 안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품을 감상하며 부조리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했다. 인간이 만들고 꿈꾸는 유토피아였기 때문에 가능한 설화였다.
 
사람은 낙원을 바라지만, 낙원의 끝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역설했듯이 인간은 넘쳐나는 물질과 끝없는 감격에 싫증을 내며 낙원이라는 꿈을 제멋대로 개조하기 시작할 것이다.
 
 
물리학자는 해와 달의 운동이 시간이라고 정의했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표피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 즉 시간은 고통이다. 시간은 인간에게 성장을 보여줌으로써 부조리를 강요하고, 사랑을 느끼게 함으로써 실연을 당하게 만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이라는 영원불멸의 고뇌를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 두려움은 모태에서 빠져나온 그날부터 계속된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며, 시간의 본질이다.

그런데 만일 인간의 무지한 소원이 이루어져 영원한 시간이 주어지고, 모두가 부유해지고, 늙지 않고, 사랑하게 되고, 병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인류의 모든 구성원이 행복의 절정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인간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 후에는 어떻게 되냐는 것이다. 권태뿐이다.

인생은 여백만 남게 된다. 어제를 추억하고,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기대해도 떠오르는 것은 거대한 백지다. 하고 싶은 일도 없고, 그리운 사람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축제가 기다려지지도 않는다. 희열도 없다. 만끽도 없다. 배부름도 없고, 포근함도 없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지겨울 뿐이다.

인류의 소원이 이루어진 곳이 한 군데 있다. 바로 천국이다. 천국에서는 일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며, 잠들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고, 미움도 없고, 다툼도 없고, 시기 질투도 없고, 그래서 베풂도 없고, 구제도 없고, 봉사도 없고, 친절도 없고, 나눔도 없다. 돌보지 않아도 꽃이 피고, 물을 주지 않아도 나뭇잎이 푸르고, 모이를 주지 않아도 새들이 지저귄다. 눈길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나를 사랑하게 되고, 내 눈에 띄는 사람마다 모두 사랑하게 된다.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권태다.
 
 

 

천국이라는 이름의 권태


 
천국을 갈망해 왔지만, 천국의 다음이 있다면, 권태뿐인 세상이 펼쳐진다. 머리에서 유레카를 외치듯 심리적 안정이라는 기분 좋음에 의지하면서도 이를 따분하게 여겨 쉽게 자극적 정보에 노출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른바 ‘도파민’이라 명명하는 신경 물질을 탐하려는 현세대를 위한 반면교사라고 느껴진다.
 
살인을 일삼았던 역사 속 평화라는 단어는 전쟁과 전쟁 사이의 막간극에 불과했다. 잠깐의 평화를 견딜 수 없어 규모 상관없이 투쟁과 전쟁을 일으키고 피로 물든 세상 위를 오르고 올라 인간은 끝내 21세기에 도달했다. 고난과 절망을 토해낼 듯이 느껴야 행복을 실감할 수 있듯 절망과 희망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필연적으로 맞닿아 있다.
 
권태 그리고 여백이라는 결과물을 내놓지 말자. 고난과 절망이란 인간의 본성, 숙명과도 같음이 틀림없다. 인간은 불행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선천적으로 유토피아를 영구히 누리고 견딜 수 없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광활히 지속되는 천국이라는 이상에 인간은 칼을 들고 전쟁을 공모하며 두 손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필연적으로 번뇌로 멍들 수밖에 없는 삶을 어깨에 이고 살아야 하는 속세에서 잠에 들고 내일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무대이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고뇌라는 무한한 괴로움을 부정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이상향을 버리는 삶에 관한 이야기가 나를 구원한다. 걱정과 열등감을 떨쳐버리게 한다.

 
내가 청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뭔가를 얻기보다는 뭔가를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라는 것이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난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건강해지려는 욕심을 버리고, 병에 걸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즐겁게 놀기보다는 욕을 먹거나 비난받지 않도록 한다. 이것은 다분히 현실적인 생활수칙이다. 이 수칙들을 지킨다면 작지만 확실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머릿속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제거하면 이 수칙들을 좀 더 쉽게 지킬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속담 중에 ‘더 좋은 일은 정말 좋아하는 일의 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불행해지기는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위선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다.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그 선택이 지혜의 시작이다. 인생의 지혜란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고, 크게 실망하지도 않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는 중용의 미덕이다. 크게 실패해도 크게 실망하지는 않는다. 크게 성공해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화려할수록 위험하다. 세상은 무대와 같아서 눈에 보이는 건 겉모습에 불리하다. 연극이 끝나면 그 화려한 무대는 순식간에 철거되어 텅 빈 창고가 될 것이다.
 
 

 

행복을 제거하라


 
행복을 목표하는 생애를 선택하기로 결심했는데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니, 지금껏 수없이 새로 고침을 하며 다짐을 적어 내려갔던 지난날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목표에 집착하며 행복을 거두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며 들끓는 고뇌를 멈추지 않는 것만큼 거대한 비애도 없다. 집착을 버리고 행복을 누리겠다는 기대를 제거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에 한걸음 가까워진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생이라는 게 사실 크게 휘둘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어떤 상태가 몰려오든 크게 놀라지도 않고, 크게 기대하지 않고, 크게 실망하지 않는 중용의 미덕을 지키면서 시간에 귀속된다면 조금씩 빈약한 지지대를 이루는 감정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연상해 본다.
 
절망은 연속적으로 광막히 펼쳐진 대지를 거닐며 속전속결로 확대되고 있다. 인간은 절망감에 쉽게 물들고 세상은 인간의 공허한 마음속을 비관으로 채우도록 강요한다.
 
사실 미래가 어떠한 모습과 형태로 변모할 것인지, 현 상태보다 나은 모습일지 혹은 최악에 가까운 모습일지 아무도 지레짐작할 수 없다. 미래는 한없이 예측할 수 없어서 인간에게 온전하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불안을 선사했다. 확실하게 명명할 수 있는 것은 태생과 죽음뿐이다.
 
번민이 필연적 속성임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신기하게도 삶의 덧없음을 깨닫고 나서는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는다. ‘왜 나만 힘든 것 같지, 나에게만 불행이 찾아오는구나, 인생이라는 건 고통스러움밖에 없다.’ 등의 부정적 언어를 섞어가며 의도적으로 기운을 꺾을 필요가 전혀 없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고통이 가득한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이를 제외한 다른 어떠한 무대는 인간에게 어울릴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지 않고는 진리의 골짜기에서 길을 찾지 못한다. 그대의 마음이 추악한 이기심에 병들어 절망을 토해내지 않는 한, 그대의 영혼은 빛을 알지 못한다.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기쁨을 찾지 못한 청춘은 인생의 지혜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삶이라는 바다 위를 언제까지나 외로이 떠돌게 될 것이다. 고뇌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그대의 오늘은 최악이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쁠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의 청춘은 내일을 준비한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나그네의 길임을 그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그대의 곤한 육신을 편히 쉬게 해줄 수 있는 안식의 땅이 없음을 그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안과 안식은 그대에게서 삶의 의지를 빼앗는 적이다. 그대의 삶이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을 때 그대의 삶은 사육자의 의지를 따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의 삶이 거대한 우리가 됨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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