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의 자체 콘텐츠로, 매달 한 번씩 국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겨울이 완전히 가기 전, 강원도 바다를 보러 떠나고 싶었다. 강릉은 뻔한 느낌이고, 묵호는 최근에 너무 핫해졌고, 정동진은 여름에 갈 거고... 그렇게 첫 여행지는 속초로 정해졌다.
여행 시작부터 겪은 약간의 난항이 있다면, 고속터미널역에서 올라가자마자 길을 잃었다는 것! 원래도 길치인 나를 그 거대한 터미널에 혼자 떨어뜨려 놨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다행히 시골 쥐는 20분을 헤맨 끝에 버스에 올라타 가슴을 쓸어내렸다.
버스를 타는 손님이 나 포함 4명뿐이라 엄청난 적자가 아닐지 걱정되긴 했지만 쾌적하게 갈 수 있었다. 2시간 30분을 푹 자고 일어나자 창문 너머로 설악산이 크게 보여, 강원도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혼자 여행을 가서 가장 기분이 좋은 순간은 배낭 하나 메고 버스에서 내릴 때가 아닐까. 그렇게 터미널을 나와서는 찾아둔 식당으로 향했다. 한적하고 낯선 거리를 혼자 뚜벅뚜벅 걷는데, 첫 혼자 여행지였던 통영에서의 그리웠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속초에서의 첫 끼는 바로 옹심이 고르곤졸라. 옹심이를 한 번도 안 먹어봐서 궁금했는데, 들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고민이었다. 그러다 이런 근사한 메뉴를 파는 브런치 가게를 발견해 찾아가게 되었다.
어느 골목길에 있는 따스한 분위기의 가게. 인테리어도 예뻤고, 좋은 음악과 크림 냄새가 퍼져있는 공간이었다. 옹심이를 크림에 듬뿍 묻혀 한입 먹자마자 순수하게 행복해졌다.
싹싹 다 먹고 나와 향한 곳은 속초해수욕장. 도심과 바다가 이렇게 가깝다니 부러웠다. 걷다가, 앉았다가 하며 한참 바다를 보았다. 예전부터 혼자 바다에 가서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걸 정말 해보고 싶었다. 고개를 아무리 돌려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다 바다일 때. 언제나 그런 바다를 보면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다만 이쯤에서 또 시련이 있었다면, 날씨 요정에 실패해 날이 조금 흐렸다는 것. 바닷바람이 상당히 많이 불어 점점 추워졌다는 것. 손이 얼고 머리가 딱딱 아프도록 말이다.
그래서 원래는 숙소 쪽까지 도보로 50분을 이동할 의향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저체온증이 올 것 같아 포기하고 시내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에서 소소하게 웃겼던 것은 할머니들이 타자마자 서로 "어머, 어디 가?" 이렇게 인사를 나누시더라는 것. (외지인 청년은 소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운전이 상당히 거칠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다 흔들림이 없으시고 나만 연신 휘청거렸다. 오직 나만이. 아, 소외감.
아무튼 내려서 향한 곳은 근처의 독립 서점이었다. 속초에 가기로 한 이유 중에는 속초가 서점 투어의 성지이기 때문도 있었다.
이틀 동안 세 군데를 방문했는데, 첫 번째 서점은 '완벽한 날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분위기를 매우 애정하는 나로서는 이름부터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책을 잘 사서 읽는 편은 아님에도 서점을 좋아한다. 책이 가득한 공간 자체가 좋고, 서점마다 다른 큐레이션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고, 또 서점마다 똑같이 있는 화제의 책들을 체크할 수 있다. 이곳에서도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잔뜩 메모해 왔다.
원래는 체크인 후 등대해수욕장 앞 카페에 가려 했었지만, 날이 흐리기도 하고 음료도 끌리지 않아 방에서 쉬며 책을 읽기로 했다.
이번 여행을 함께한 <말테의 수기>는 예전에 시도했다가 이런 메모를 남기고 덮었던 책이다. '소설인데도 시를 읽는 것 같고 너무 좋은데, 나중에 머리가 좀 더 크면 종이책 사서 밑줄 그어가면서 읽고 싶은 책'. 그리고 마침 여행을 떠나기 전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이 책을 받고, 지금이 그 순간임을 알았다.
그렇게 밑줄을 쭉쭉 그어가며 책을 읽다가, 저녁 시간이 되어 주섬주섬 나갔다. 두 번째 끼니는 섭국. 크고 실한 홍합과 부추, 달걀, 팽이버섯, 콩나물 정도가 들어간 음식이다. 국물도 칼칼하니 정말 맛있었다.
특히 손님이 없어서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더 특별한 기억이 되었다. 내향인으로서 약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여행의 묘미 같아서 괜히 기분이 들떴다. 남은 여행 잘하시라는 에너지 드링크 선물까지! (리뷰로 보답했다)
밥을 먹고 나오자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계획대로 밤바다를 보러 갔다. 우산 쓰고 밤바다를 보는 미친 여행객은 나뿐이었다.
주변이 조용해서인지 파도 소리가 새삼스럽게 컸다. 천둥처럼. 그리고 무척 깜깜했다. 그 앞에 서서 한쪽 귀엔 이어폰을 꽂고 한쪽으로는 파도 소리와 빗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있었다. 숨 막히게 좋았다.
그리고 대게 닭강정과 캔맥주를 사서 돌아왔다. 몇 시간 동안 TV로 음악을 틀어놓고 창밖을 보며 혼술을 했다. 흥얼흥얼, 흔들흔들. 원래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혼술은 난생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이 밤이 너무나 즐거웠다. 여행 중 손에 꼽히도록.
다음날에는 날씨가 어제보다 맑아서 아침부터 신이 났다. 이날은 일행과 합류해 우선 멋진 카페에 들러 감자, 옥수수, 홍게 타르트를 포장했다. 타르트는 나중에 먹어본 결과 옥수수가 미치도록 맛있었으니 참고하시길.
2일 차 첫 끼는 홍게 샌드위치. 속초에 오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였던 만큼 정말 훌륭한 맛이었다. 게살, 치즈, 파인애플, 토마토, 양상추 등 재료 맛이 하나하나 잘 느껴지면서도 조화롭게 맛있었다.
그리고 영랑호 스타벅스로 이동해 시간을 보냈다. 무려 360도로 바다, 호수, 산이 다 보이는 경치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산이 사진보다 훨씬 크게 보이고, 쌓인 눈 위로 햇빛이 내릴 때마다 산수화처럼 아름다웠다.
영랑호 쪽으로 더 내려가서 산책도 했다. 물소리도 듣고, 흔들거리는 다리도 건너고, 망원경으로 백로도 보고. 여행이 다 그렇듯, 별거 아닌데도 신나서 아이처럼 깔깔거렸다.
그리고 서점 투어가 이어졌다. 각각 40년, 70년 역사를 지닌 '문우당서림'과 '동아서점'을 방문했다. 개인 서점들이 이렇게 규모가 큰 것은 처음 봐서 신기했다. 넓은 공간에 가득한 책 냄새가 참 좋았고, 종이와 문장에 잠겨있는 듯한 기분이 좋았다. 서점마다 특색 있는 코너를 구경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3월부터는 비수기라 그런지, 어디를 가나 전반적으로 사람이 많지 않아서 좋았던 여행이다. 시장에도 들러서 갓 튀긴 새우튀김을 사 먹고, 술빵과 닭강정도 샀다.
마지막 끼로는 역시 물회와 전복죽을 먹어주었다. 청초호를 바라보며, 상대는 바다보다 호수가 더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파도는 왔다가 계속 가버리지만, 호수는 똑같이 흐르기 때문에. 동감하지만 나는 굳이 따지자면 그래도 바다가 더 좋은 것 같다. 호수는 잔잔하지만, 바다는 더 많은 것들이 살아 움직이고 변하는 곳이니까.
스물셋, 3월. 한 계절을 맺으며 나는 초속 3센티미터로라도 좋으니 계속 나아가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