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휴먼 장르에서 유독 좋은 드라마가 많이 나온 듯하다. 봄에는 <폭싹 속았수다>와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이 있었고, 여름에는 <미지의 서울>이 있었다.
그리고 가을에는 <은중과 상연>이 있었다. 아직 두어 달이 남기는 했지만, 올해 최고의 드라마 타이틀을 일찌감치 <은중과 상연>에 달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 글은 작품 전반에 대한 반추로, 내용 전개에 관한 스포일러는 포함되어 있으나 세부적인 사건들의 언급은 없음을 밝힌다.
10대
이 작품의 불호 리뷰에서, 둘의 우정이 사실상 중학생 때 말고는 깊었던 적이 없지 않으냐는 내용을 보았다. 맞는 말일 수 있으나, 둘은 그 중학생 때의 매듭만으로 계속 깊게 갈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서툴고 예민했던 시절, 나의 바닥을 다 본 유일한 친구. 그때 이미 서로의 삶에 뿌리내린 것이 아닐까. 은중의 반지하 집에 유일하게 와본 것이 상연이었고, 상연의 가족사와 상처를 아는 것은 은중뿐이었다.
이 드라마의 최대 강점은 섬세한 감정선인데, 인물들이 어린 나이대일 때부터 그것이 두드러진다. 은중의 시선에서는 부유한 집에서 크고 다재다능한 상연이 큰 사람 같아 보이고, 또 상연의 시선에서는 다정한 엄마에게 사랑받고 그 사랑을 주변과 곧잘 나누는 은중이 더없이 큰 사람 같아 보인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나는 얘를 이길 수 없겠구나'라고 거듭 생각하는 마음이 아릿하게 와닿았다. 그럼에도 서로를 너무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마음 역시 그랬다.
20대
그렇게 흘러가던 은중과 상연의 10대를 삼켜버린 것은 상연의 오빠 천상학의 죽음이었다. 상연은 동네를 떠나 숨어버렸고, 천상학을 좋아했던 은중도 그 충격에 오래 휩쓸렸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재회하게 된 계기인 대학 사진 동아리 역시 그의 영향이었다.
둘은 함께 자취를 할 만큼 다시 가까워지지만, 은중의 애인이자 동아리 선배 김상학이라는 인물을 두고 서로를 향한 감정의 골도 더욱 깊어진다.
은중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상연에 대한 동경, 상연은 우리 관계를 언제든 또 놓아버릴 수 있으리라는 불안 등을 느낀다. 반면 상연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깊은 절망감과, 이제 은중보다도 형편이 어려워진 것에 대한 부끄러움 등을 연신 느낀다.
그렇게 흔들리던 때 쐐기를 박은 것은 상연의 엄마 윤현숙의 죽음. 아직 스물두 살 어린 나이였던 상연에게는 여러모로 가혹한 상황이었고, 엇갈림 끝에 상연은 결국 또다시 은중을 떠나버린다.
30대
중학생 때 오빠를 잃고, 아빠와는 의절하고, 대학생 땐 엄마를 잃었다면 누가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이전보다 더 날카롭고 독기가 가득한 30대 상연의 모습을 보았을 때, 상연을 '나쁜 년'으로 칭하는 시청자들이 많아졌지만, 이만큼 살고 있는 거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은중과 상연, 상학은 영화계에서 동료로 다시 만나 작업을 하게 된다. 상연은 여전히 은중의 선의를 외면하고 상처를 주며, 상학을 한층 맹목적으로 좋아한다. 그녀는 누가 봐도 위태롭고, 완전히 뒤틀려있는 듯하다.
20대 상연이 김상학을 좋아했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는 성별을 떠나 상연에게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상연은 은중을 더 좋아했기에 마음을 숨기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30대 상연이 김상학을 원하는 마음은 절박한 발버둥에 가까워 보였다. 일련의 사건 끝에, 은중에게 네가 나만큼 망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은 어쩌면 더는 망가지고 싶지 않다는 울음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40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은중을 찾아와 사과하는 상연은 사뭇 뻔뻔하고 능청맞다. 하지만 상연으로서는 큰 용기이자 그녀의 짧은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틀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떨리고 염치없는 일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예로부터 여성 2인의 우정극은 꼭 남성 1인과의 삼각관계를 포함한다. <은중과 상연>도 그 이유로 일각에서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40대의 은중과 상연은 김상학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상연의 삶에 남은 이름 중 김상학은 없다. 상연을 끝내 받아준 사람은 분명 류은중이다.
마지막 화에는 현재도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은, 스위스 조력사의 과정이 낱낱이 담겨있다.
상연은 과연 이기적인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불과 지난달 나 역시 스위스 여행을 다녀왔는데,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도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에 감탄, 또 감탄만 나오곤 했다. 상연의 눈에도 그곳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녀는 얼마나 뼈저리게 아쉬웠을까.
*
상연은 은중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은중이 상연 자신을 가장 혐오스럽게 만드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그럴 수 없는) 사람에게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오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비참함이었겠지.
은중은 자신의 엄마에게 상연이 싫은 게 아니라, 밉다고 말했다. 싫은 건 생각이 안 나서 좋은 거고, 미운 건 생각이 나서 힘든 거라고. 자비 없고 얄궂은 세상에서 사랑이 사랑의 형태를 띠지 못하게 되기까지. 그 잔해 속에서 은중과 상연이 보다 평안해졌으면 한다.
대본집이 나온다면 반드시 사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가을이 지나가기 전, 천천히 감상해볼 만한 드라마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