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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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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한 번은 죽음 같은 사랑이 찾아온다. 그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리거나 젊을 때 사랑을 알아본다면 계산 없이 뛰어들 수 있다. 감당할 현실의 무게가 가볍고,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젊음이 지난 후 찾아오는 사랑은 어쩌면 생 마지막일 수도 있기에 더 애틋하다. 두 경우 모두 이뤄지지 않아도 순수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미 결혼을 한 후에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마음을 무조건 아름답다고만 칭송할 수 있을까.


과거 왕족이나 귀족 간의 정략결혼은 사랑보단 계산으로 이뤄졌다. 당사자들의 마음보단 어떤 국가·가문끼리 결합하는지, 결혼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가 훨씬 중요한 사업이었다. 심지어 연애결혼이 활성화된 오늘날조차 정략결혼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결혼은 짧은 로맨스가 아니라 긴 현실이며, 돈이 오가는 거래이자 가족과 가족 간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가 1878년에 발표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안나 또한 남편 카레닌과 정략결혼을 한 여성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안나는 사교계 유명 인사다. 엄격한 남편 카레닌은 사회적 규율과 평판을 중시하지만, 부유한 고위 관료다. 부부 사이엔 세료자라는 아들도 있다. 겉만 보면 안나는 남부러운 것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의무를 이행하던 안나에게 여성으로서의 사랑은 없었다. 안나가 전도유망한 젊은 군인 브론스키와의 금지된 감정에 빨려 들어간 건 필연이었다. 브론스키를 선택하면 누군가의 딸, 여동생, 아내, 어머니로만 사느라 갖지 못했던 자유와 행복을 쟁취할 수 있을 거라 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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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소설 원작 러시아 라이센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세 번째 시즌이 2026년 2월 20일 개막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3월 29일까지 공연되는 <안나 카레니나>는 2018년 초연, 2019년 재연 이후 7년 만에 돌아왔다. 작품은 한국 관객에겐 다소 낯선 정서와 장면 구성의 러시아 뮤지컬임에도 독특한 무대 연출·넘버 등을 호평받으며 공연 중이다.


이번 시즌 새롭게 합류한 김소향은 첫 공연부터 완벽히 안나로 분(扮)하며 관객을 19세기 러시아의 겨울로 데려갔다. 대극장과 중소극장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는 김소향은 대표작 <프리다>, <마리 퀴리>, <웃는 남자>, <마리 앙투아네트>, <에비타> 등에서 보여준 처절한 생명력과 뜨거운 욕망이란 갑옷을 안나에게도 입혔다. 김소향은 갑옷 안에 숨겼던 우울과 불안이 폭발하며 파국으로 질주하는 안나를 설득력 있게 연기하고 노래했다. <안나 카레니나> 또한 그의 대표작이 되기에 충분한 압도적인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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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같은 이끌림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파멸로 향하는 안나와 브론스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순수한 사랑의 본질을 찾은 키티와 레빈. 작품은 두 커플의 대조적인 서사를 통해 말하려는 바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브론스키에게 청혼받을 예정이었으나 무도회에서 배신당한 공작 딸 키티는 상처받는다. 농부 레빈의 진심을 뒤늦게 깨달은 키티는, 김이 서린 창문에 레빈과 글자를 쓰며 마음을 주고받는다. 위선적인 사교계와 도시, 즉 ‘끔찍한 무도회’에서 탈출한 키티는 농촌에서 레빈과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자유와 행복을 찾아 브론스키를 선택한 안나는 모든 걸 잃는다. 그는 아들 세료자를 만날 수 없게 되며, 사회적 지위 또한 예전만 못하다. 카레닌의 아내 자리를 버린 안나에게 돌아오는 거라곤 차가운 시선뿐이다. 힘겹게 쟁취한 사랑조차 손에서 서서히 빠져나간다. 안나의 우울과 불안, 감정 기복은 브론스키의 마음을 식힌다.


불륜은 혼자 저지를 수 없다. 그럼에도 브론스키는 귀족 회의에서 당당하게 나랏일을 논의한다. 반면 안나는 오페라 공연을 보는 것조차 힘들다. 만류를 뚫고 겨우 간 극장에선 비난을 온몸으로 견딜 수밖에 없다. 과거를 잊고 안나를 용서한 키티가 귀족들의 손가락질을 막아서지만, 그 또한 남편 레빈에게 제지당한다. 묘한 유대감으로 묶인 두 여성의 운명은 정반대로 흘렀지만, 남자 그늘에 살며 사소한 행동조차 뜻대로 못 하는 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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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엠씨(M. C. : Master of Ceremonies)’라는 원작엔 없는 인물을 추가하며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했다. 나레이터인 엠씨는 관객에게 계속 말을 걸며 주제를 강조한다. 엠씨는 역장, 무도회와 경마를 이끄는 인물 등으로 출연하며 극을 이끌고, 인물 심리를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안나의 삶과 죽음, 운명을 상징하는 기차역에서 엠씨는 규칙을 지키라 말한다.


기차역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우연히 만난 장소이며, 극 중반엔 그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안나는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생을 마쳤다. 결혼한 여성이 지켜야 할 규칙을 어기며 탈선(脫線 : 기차나 전차 따위의 바퀴가 선로를 벗어남)한 안나는 금지된 사랑이란 열차에 삶을 내던진 것이다.


작품 클라이막스이자 안나가 최후를 결심하는 순간은 오페라 가수 ‘패티’가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를 부르는 장면이다. 패티는 19세기 후반 유럽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오페라 가수 ‘아델리나 패티’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탄생한 캐릭터다. 극 중 귀족들은 패티의 아리아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이러한 상황은 작품 밖에서도 펼쳐진다. 약 4분간의 넘버는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를 보러 온 실제 관객들에게도 ‘패티’를 연호하게 만든다.


패티가 노래하고, 안나가 그 노래를 듣는 모습에선 신의 계시를 받는 연약한 인간이 연상된다. 극 중 패티는 대사가 없으며, 노래도 한 곡뿐이다. 어떤 인물인지, 공연 전·후엔 뭘 하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천사인지 악마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황홀한 ‘목소리’가 정체성인 패티는 작품 속 안나와 작품 밖 관객을 몇 초 만에 압도한다. 이러한 위압감은 무대 위층에서 빛을 받으며 노래하는 패티와 어두운 바닥 의자에서 몸을 웅크린 채 눈물을 쏟으며 노래를 듣는 안나의 구도에서도 드러난다. 오페라 가수의 형상을 한 신의 목소리는 구원이었을까, 심판이었을까. 자유와 행복을 열망하던 안나가 죽음 같은 ‘사랑’이 아닌, ‘죽음’을 택했기에 심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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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다른 선택을 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톨스토이와 당시 사회의 가치관을 그려낸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상류사회와 농민 사회를 모두 경험했던 톨스토이는 레빈을 분신으로 여겼다. 레빈은 농촌 생활, 노동, 가족을 통해 행복을 찾으며 키티에게 순수한 마음을 바쳤다.


키티와 레빈의 선택은 평화를 가져다줬지만, 안나의 선택은 스스로를 불길로 이끌었다. 기차가 탈선한 자리, 한 여성이 궤도를 벗어난 자리엔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엠씨의 목소리만 맴돌 뿐이다. 19세기 러시아뿐만 아니라 오늘날을 사는 우리 또한 눈보라에 갇혀 자유와 행복, 속박과 불행 사이를 헤매는 건 마찬가지다. 당신이 안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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