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우리는 배소연 선생님의 몸을 따라갔다.
2편에서는 그 시간이 어떤 판단과 기준으로 이어졌는지를 묻는다. 전통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조정해야 하는가, 그리고 K-콘텐츠가 전 세계로 확장되는 지금, 한국 전통예술은 어떤 역할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더 이상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선택의 문제다.
무형유산 전수자이자 연구자, 기획자로서 국내외 현장을 오가며 전통예술의 현재를 설계해 온 그는 전통을 ‘보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계속해서 기준을 세우고 공유해야 할 문화 자산으로 바라본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녀가 전통을 대하는 태도와, 오늘의 문화 환경 속에서 전통예술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2022 연풍술제 30주년
선생님의 작업을 보면, 전통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서 멈추기보다 어떤 공간에서, 어떤 관객에게, 어떤 방식으로 보일지까지 함께 고민하고 계신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전통예술이 오래 이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전통예술이 오래 이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작품이 놓이는 환경과 관객과의 관계가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지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예술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작품의 완성도보다, 그것이 어떤 환경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경험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전통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이유와 환경이 구조적으로 만들어질 때, 전통은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장 분명하게 체감한 작업이,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세계민족무용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진행 중인 「조선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복원공연」 프로젝트입니다.
『순조무자진작의궤』 기록을 바탕으로 궁중무용과 음악, 복식, 기물을 고증해 재현하는 이 작업은, 전통이 이어지기 위해 어떤 조건들이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지를 현장에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업은 연구와 기록, 제작과 운영, 문화재 공간의 특성, 관객 경험까지 함께 고려해야 비로소 하나의 공연으로 완성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저는 전통이 개인 전승자의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으로 축적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통을 과거에 머무른 유산이 아니라, 시대마다 새롭게 해석되며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문화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태평무 개인 발표회
물론 전승자로서 작품의 역사성, 장단 구조, 춤사위, 전승 계보, 의상과 소품에 대한 이해는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기본입니다. 이 기본이 흔들리면 전통은 더 이상 전통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국가무형유산 태평무와 처용무, 그리고 경기도 무형유산 경기검무 전수자로 활동하며 원형을 존중하는 태도가 전통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의 문화 환경에서 전통은 원형 보존만으로 관객과 연결되기 어렵고, 반대로 변형만 강조하면 전통의 정체성이 약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전통을 지키는 기준이 형식 자체가 아니라, 전통이 지닌 미학과 철학을 이해한 상태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조정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이 판단이 가능할 때, 전통은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현재와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기준은 전승자 개인의 태도를 넘어, 사회가 전통을 어떻게 경험하고 이해하느냐와도 연결됩니다.
연구소에서 학술심포지엄과 연구-공연 연계 사업을 기획하며, 전통을 지키는 기준이 감각이나 경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료와 연구, 담론 형성, 그리고 공연 현장이 연결되는 구조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점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관객이 다양한 전통예술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공연 기획과 제작에 참여하며 실연 현장뿐 아니라 연구, 기획, 제작, 유통 등 여러 영역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독 공동제작
K-콘텐츠가 대중성과 확장성을 통해 세계와 만난다면, 전통예술은 장식이 아니라 그 콘텐츠가 어떤 감정 구조와 세계관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뿌리라고 봅니다.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에서 한-독 공동제작 「공허와의 만남(Hello to Emptiness)」 프로젝트 매니저로 참여하며 협업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전 지구적 애도’를 주제로 한국 무속 의례인 황해도 ‘지노귀굿’의 치유 구조를 현대 무용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이었는데요. 코로나19로 제작 환경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저는 전통 의례의 감정 구조와 상징체계를 공연 언어로 해석하고 해외 창작진과 국내 예술가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 전통 공연예술이 인간의 상실과 공동체 치유라는 보편적 감정을 담고 있으며, 국제 창작 환경에서도 중요한 예술적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K-콘텐츠 환경에서도 전통 요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봅니다. 글로벌 콘텐츠 속에서 갓, 의례 소품, 무속적 이미지 등이 캐릭터와 세계관을 형성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케이팝 데몬 헌터스>(2025)와 같은 콘텐츠에서 전통 의상과 의례적 상징이 서사 구조와 캐릭터 설정에 활용되는 사례를 보며, 전통문화가 시각적 요소를 넘어 이야기의 기반이 되는 문화 자산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통예술이 서사와 경험을 형성하는 기반으로 작동할 때, K-콘텐츠는 더욱 깊이 있는 문화 경쟁력을 갖게 된다고 봅니다.
앞으로 저는 전통공연예술이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 구조’로 성장하는 흐름 속에 하나의 선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제 예술 여정을 돌아보면 과거에는 춤을 연마하는 실연자로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해 왔고, 현재는 실연자이자 기획자, 그리고 전승 활동을 병행하며 전통이 관객과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활동해 왔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흐름을 확장해 전통예술이 창작·유통·교육·연구·콘텐츠 산업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공연예술은 오랜 시간 동안 수 세기에 걸쳐 인력 중심의 노동집약적 구조 속에서 운영됐습니다. 공연은 배우와 무용수, 연주자, 스태프 등 많은 인력이 동시에 참여해야 완성되는 예술이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리적 제약을 크게 받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공연예술이 지닌 현장성과 몰입도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동시에 작품이 반복 생산되거나 유통 구조가 확장되는 데에는 한계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디지털 콘텐츠 환경과 AI 기술의 발전은 공연예술이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는 예술 분야 내부 협업을 넘어 기술, 교육, 콘텐츠 제작, 플랫폼 산업 등 타분야 전문가들과 협력하며 전통예술의 확장 경로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AI 시대의 제작 환경은 공연예술이 무대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영상, 플랫폼, 데이터 기반 문화산업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저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전통예술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대 문화 언어로 재해석될 수 있는 기획 작업을 시도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연결 구조를 만드는 작업을 통해 전통공연예술이 미래 세대와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 기반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전통예술을 고민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말보다 먼저 “왜 이어가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는 것입니다.
전통은 저절로 지속되지 않습니다. 매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자기 시대의 언어로 전통을 이해하고 선택했기 때문에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전통을 배운다는 것은 기술을 익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전통이 어떤 미학과 철학으로 형성되었는지까지 함께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또 하나는 ‘활동 영역을 넓히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저는 실연과 함께 기획과 연구를 병행하며 전통이 사회와 만나는 통로가 다양해질수록 지속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양한 현장을 경험하며 느낀 것은, 전통예술은 무대 위에서만 유지되기 어렵고 교육·기획·연구·기록·유통이 함께 돌아갈 때 지속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협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전통이 해외 창작진에게도 강력한 창작 언어가 될 수 있고, 다른 장르와 만나며 관객층을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확인했습니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혼자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과 환경과 관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전통예술은 오래 걸리는 길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수련의 시간이 쌓이는 만큼 예술은 깊어지고, 그 깊이가 결국 관객을 설득합니다. 전통을 부담으로 느끼기보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질문을 전통 안에서 발견하고, 전통을 창작 자산으로 삼아 자기 길을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
전통을 이어간다는 말은 종종 무거운 책임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에서 배소연 선생님이 보여준 것은, 전통을 짊어지는 태도보다 전통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가까웠다. 몸으로 쌓아온 시간 위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일, 그리고 그 질문을 사회와 나누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
전통은 그렇게 한 사람의 삶과 선택을 통과하며, 다음 시간으로 건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