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죽음 뒤를 상상하는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죽고 나면 모두 날 잊었으면 좋겠어, 아니야 나는 사후세계에서 모두와 다시 만날 거야, 등등 얕은 상상력이 더해진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그러다 죽음 이후에 나의 유골이 어떤 방식으로 다뤄 지길 원하냐는 질문에는 제각기 막연히 상상하던 희망사항을 꺼내기도 한다. 이미 자신의 자리까지 정해진 가족 묘가 있다는 이부터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세계 각지에 화장한 유골을 뿌려 달라는 이까지 그 기준도 참 다양하다.
나 또한 곰곰히 생각해본다. 언젠가 다가올 죽음의 순간을 넘어 내가 더 이상 나로서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남겨지고 또 다루어지고 싶을까? 오랜 고민이 필요하진 않았다. 먼 훗날 그 순간에는 내 뼛가루를 흩뿌려 주었으면 한다. 드넓은 바다도 높은 산 정상도 아닌 깊은 숲 속 어느 양지 바른 곳에 말이다.
흔히 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묘사되는 장면은 바닷가에서 화장한 유골을 뿌리는 모습이다. 늘 흐르는 바다는 왜인지 자유롭게 느껴지고 그 안에 뿌려진 이 또한 죽음 이후의 삶을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존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바다보단 숲에 뿌려지고 싶다. 내가 바다보다 숲을 사랑하는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어쩌면 내가 숲에 남겨지고 싶은 이유가 내가 숲을 사랑하는 이유와 같을지도 모른다.
우선 나는 숲의 압도적인 생명력을 사랑한다. 숲에 들어서는 순간 걸음마다 각기 다른 생명들을 마주하게 된다. 숲이라는 생태 자체가 수십년도 훌쩍 넘은 나무들의 군락이다. 그 군락 안에는 서로에게 무관심하기도 위협적이기도 한 생명체들이 그들 나름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간다. 숲의 한 가운데 가만히 누워있으면 굳이 보지 않고 소리만으로도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흩날리는 나뭇잎의 쏴아아 시원한 소리,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화음을 이루는 새소리, 귀 근처에서 언뜻 위잉 날아다니는 벌레 소리까지 이 각기 다른 악기 연주자들이 악보 하나 없이도 거슬림 하나 없는 합주를 이루어 낸다. 엄밀히 따져보면 이런 넘쳐흐르는 생명력의 아름다움은 숲 속의 그들에겐 하루하루 치열한 생존의 사투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이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어떠한 꾸밈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사실이 나에게 아주 깃털만큼의 족쇄도 묶이지 않은 편안한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이와 연결되어서 나는 숲의 폐쇄성 또한 사랑한다. 폐쇄적이라는 단어가 긍정성을 나타내기는 쉽지 않지만, 숲은 타인의 시선과 방문에 있어서 철저히 배타적이고 나는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늘 상 잘 정돈된 산행로를 따라 숲을 드나들며 잊게 되는 사실 하나가 사실 숲은 들어가기도 힘들고, 나오기는 더 힘들다는 것이다. 여러 전래동화에서 숲에서 기이한 경험을 하거나 실종되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숲은 이방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그러나 숲의 일부분이 될 수만 있다면 반대로 숲은 나를 거추장스러운 관심과 시선에서 보호해주며 안락한 보금자리를 제공해준다. 높은 나무와 풍성한 잎사귀들은 외부의 풍경을 차단함으로써 내가 이 생명의 그릇에 온전히 잠길 수 있게 도와준다.
이렇듯 사랑스러운 곳이 바로 숲이라는 공간이지만, 이를 온전히 즐기기는 참 어렵다. 장엄한 자연환경에서 버티기에 인간으로써의 나의 몸은 너무나 나약하고 또 불완전하다. 여름엔 더위가, 겨울엔 추위가 끊임없이 찾아온다. 침입자를 경계하는 야생동물들과 일일이 분간하기도 힘든 수천 종류의 식물들 또한 많은 위험을 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걸림돌은, 날 때부터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에서만 살아온 나 자신이다. 제 아무리 숲을 사랑해도 이 모든 안락함을 포기하고 지내기에 나 스스로는 너무나 연약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죽음 후에 그곳으로 가고 싶다. 더 이상 온도를 느낄 피부도, 불편함을 느낄 정신도, 위협을 받을 신체도 존재하지 않을 그 때, 나는 깊은 숲 어딘가에 흡수되어 머무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