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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어쩌면 현시대는 ‘태어나는 행위’마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방적인 ‘폭력’이라 주장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살아 숨 쉬며 수많은 폭력을 경험하고, 폭력에 아파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그런데 이 고통이 마치 스포츠처럼 감상의 대상이 될 때가 있다. 바로 가상 매체에서 폭력이 다뤄질 때다.


액션 영화의 화려한 타격감, 피가 튀고 욕설이 난무하며, 사람이 죽고, 혹은 고통 그 자체의 삶. 매체에서 폭력이 이렇게 빈번하게 호출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폭력은 도저히 미화되기 어려운, 모두에게 보편적인 공포이자 고통이며, 우리 모두가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면서 폭력과 고통이라는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없다.

 

하지만 그 폭력을 매체로 마주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하고 이를 감상하나? 나는 이것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싶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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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영화가 뭐예요? 라는 질문에 등장하는 몇 가지 영화가 있다. 다양한 영화가 있지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는 의외로 자주 제시되는 영화이다. 나 역시 이 영화를 중학생 시절, 누군가의 인생 영화라는 추천을 받고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마츠코의 험난하고 고달픈 일생을 아주 동화적으로 그려낸다. 화려한 원색과 마치 뮤지컬처럼 극적인 연기와 연출은, 마츠코의 고단한 삶과 고통을 ‘블랙 코미디’로 치환해 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받고 싶은 마츠코의 일생은, 혐오스럽기 그지없기에.


당시 영화를 처음 보고 들었던 질문은 왜? 였다. 끝내 버려진 마츠코가 돌아오지 않는 그녀의 사랑에 “왜?”를 외쳤듯. 이 영화를 무엇 때문에 인생 영화라 추천하는지, 이 영화를 보고 고통 외에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종종 이 영화의 후기를 자주 찾아보았다. 결핍이 사람을 만든다, 세상에는 마츠코와 같이 사는 여자도 있다, 마츠코의 사랑이 대단하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과 감상을 낳는 훌륭한 작품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서 그토록 찝찝하고 당혹스러웠던 이유는 하나이다. 아름답고 동화적인 색채로 멀찍이서, 정확히는 ‘내려다보듯이’ ‘관람’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진 마츠코의 삶.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관람자와 감독의 태도가 거북했다.


창작물이고 허구이기에, 영화 속 인물은 무참히 망가져도 되는가? 그 망가짐과 우리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 안전하게 평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서브스턴스(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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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얘기했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일명 혐츠코와 서브스턴스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서브스턴스는 여성, 그리고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구조적인 폭력을 폭력으로서 말하는 ‘바디 호러’ 장르니까.


서브스턴스는 한물간 할리우드 스타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더 나은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서브스턴스’라는 약을 사용하며 시작된다. 엘리자베스의 등을 가르고 태어난 아름다운 여성 ‘수’와, 둘은 일주일씩 몸을 바꿔가며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서브스턴스에서는 폭력을 혐츠코와 같이 예쁜 색지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신체의 노화, 아름다움, 여성에게 가해지는 미적 강박과 섹슈얼리티의 강요, 그 모든 것을 최대한 낱낱이 해부하고 선명히 찍어 보여주고 있으니까.


여성 감독이라는 것 역시 영화를 감상하고 판단하는 것에 있어 주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혐츠코와 달리 인물들과 가까이 자리한 곳에서, 폭력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영화가 전적으로 올바르다거나, 폭력을 윤리적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늙고 병든 육체는 혐오스럽게, 젊고 팽팽한 육체를 탐닉하듯 보여주는 카메라는 육체와 노화에 가해지는 폭력적인 압박과 시선을 고발하는 동시에, 그를 그대로 담습하고 있기도 하다. 엘리자베스의 고통을 목격하는 동시에, 우리는 그녀의 육체나 노화를 혐오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구경하게 된다.


서브스턴스의 감독은 자신이 선택한 방법이 어떤 폭력인지 잘 알고 있다. 폭력을 폭력으로 보여주는 만큼, 그에 대한 비판도 서슴없이 받아들일 테다. 감독은 처음부터 폭력을 고발하고자, 어쩌면 이를 관람하는 관객들에게도 돌려주고자 고통스럽고 끔찍하기 그지없는 영화를 만들었으니까.

 

 


관중석, 혹은 관객석에서

 

나는 이처럼, 처절하게 폭력적인 삶과 순간을 보여주는 매체를 볼 때 일말의 죄책감이 든다. 누군가는 매체를 보며 폭력이나 고통을 경험하는 것 역시 독자의 태도이자 의무라고 말한다. 혹은 그것이 예술 작품의 본질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문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매체에 등장하는 이들이, 마치 형벌 같은 삶과 고통을 내장까지 낱낱이 해부되어 우리에게 보여질 이유가 무엇인가?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해도, 그 허구는 스크린 내에서 분명히 살아 있으며, 결국 현실을 살아가는 누군가와 맞닿아 있다. 우리가 픽션 속 비극과 폭력을 멀찍이서 감상하고 즐길 때, 현실의 폭력을 타자화하게 되지 않나?


또한 만들어진 인물에 대한 예우도 아니라고 느낀다. 그들이 겪는 고통은 블랙 코미디, 바디 호러 등 다양한 이름이 붙어 즐길 수 있는 ‘장르’로 취급되며, 가벼이 여겨진다. 카타르시스를 위한 소모품으로 사용하고 관람하게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느끼고 감상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시된 타인의 삶을 소비하고 평한다. 어쩌면 예정된 폭력을 기꺼운 마음으로 관람하고 있지는 않나? 왜냐하면 내가 안전한 장소에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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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장면은 만화 『격기 3반』의 한 장면이다.

 

이 만화는 격투기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실상은 폭력의 연쇄와, 우리가 어떻게 폭력을 합리화해 왔는지, 또 폭력과 유리된 위치에서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다룬다.


또한 이 장면은, 연재 중 작품보다는 지각이나 분량에 대한 도 넘은 비난과 악플에 시달리던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서 메타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기도 한다.


앞서 말한 모든 작품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폭력을 저런 식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다양한 논의를 나눠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작품이라는 반증이다.


나 역시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공부하는 습작생으로서, 폭력을 다루는 것은 인간에 대해 말하기 위한 숙명임을 안다. 인간과 폭력은 떼어놓을 수 없으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모든 방식은 어떤 의미로는 타인을 침범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폭력에 대해 다룰 때, 창작자도, 이를 수용하는 독자도, 우리가 어떤 태도로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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