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스타그램 릴스는 외국 콘텐츠가 많이 등장한다. 드라마 플리백의 유머 장면은 꽤 단골이다. 연필 머리가 된 언니를 프렌치 스타일이라며 어떻게든 북돋으려던 주인공, 페미니스트로 가득 찬 연설장에서 완벽한 몸매를 위해 목숨을 날릴 수 있다며 손을 들던 둘. 스토리를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연극 플리백이 막연히 웃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맞았다. 한 30% 정도.
외로움, 괴로움, 공허함, 분노, 처절함.
성적인 것이든 자조적인 분노이든, 끊임없이 관객에게 농담을 던지는 주인공은 겉으로는 자유분방한 영혼이나 속이 곪다 못해 터져있다. 애인은 집안 가전을 다 들고 떠났고, 둘도 없는 단짝은 아예 세상을 떠난 데다, 부모와의 관계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위해 낯선 이와의 만남을 자처하고, 빈털터리의 동아줄 같은 면접은 거하게 말아먹는다. 이 모든 게 꼬인 이유는 분명하다. 분명하게 보인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운 무언가라서.
플리백은 자학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나를 얼마나 미워할 수 있는지, 그 혐오가 나를 어떻게 망치고, 내가 어떤 괴물이 되어 주변 모든 것을 망치는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그런데도 얼마나 희극적인지. 불편하게 웃기고 파격적인 이야기에 담긴 고뇌는 남 일 같지 않다. 우리 모두 나 자신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지 않은가. 나를 받아들이려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고 있으니까.
주인공이 잘 해보려고 애를 쓸 때마다, 그리고 자꾸만 그것을 꼬아버리는 선택을 할 때마다 나는 모순된 감정을 느낀다. 그녀의 선택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공감이 가는 거다. 노트에 필기하다가 화이트로 한 줄을 통으로 지워야 해 아예 페이지를 찢어버리는 일, 블록을 조립하다 부품이 하나 빠진 걸 알고 박살 내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는 행위. 인생은 연필로 쓰지 않으므로 꽁다리에 지우개가 없다. 이미 망친 상태에서 다른 걸 잘해보려고 애쓰느니 없던 것으로 만들겠다. 가질 수 없으니 부숴버리겠어.
인간에게는 자기 파괴적 욕구가 있다. 누군가에겐 그 욕구가 아주 작은 단위에서 일어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인생의 모든 면에서 일어난다. 우리 모두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플리백의 주인공처럼 행동해 봤다. 그러니 그녀의 "그냥 꺼져요!" 행위는 욕망의 대리 실현이자 그럴 수 있었던 가능성이다. 눈물 나는 당신의 상처가 나의 위로로 돌아온다. 나만 내가 싫은 게 아니라고, 나만 모든 걸 망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무대라는 권위의 상징이자 가상의 친구가 이야기하면, 우리의 실수와 그르침이 사면받는다.
극소수지만 완벽한 사람들이 있다. 달리 말해 본다. 자기혐오와 파괴라는 감정에 심드렁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이 작품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그저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이야기로 생각할지, 아니면 초현실주의 미술을 볼 때처럼 아득하게 느낄 뿐일지. 조심스럽지만, 그들과 친구가 되긴 어려울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든 밑바닥의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감정에 고군분투하는 이들이야말로 사람으로 느껴진다. '나와 같은' 사람 말이다.
플리백은 라이센스화를 거쳤지만 한국 정서로 번안된 작품은 아니다. 그렇기에 서양 콘텐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조금 더 권하고 싶다.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더 많을 것이다. 또 많은 1인극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연기력으로 승부를 보는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김주연 배우의 무대를 감상했는데, 이 많은 대사와 휘몰아치는 감정을 어떻게 혼자서 외우고 보여줄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은 봐야 한다고 주장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