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에 푹 빠져 밥 먹고 뮤지컬만 보던 시절이 있었다.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가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티켓팅을 하고, 대학로에 뿌리를 내리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공연을 보는 데 몰두했다. 그럼에도 금전과 체력엔 언제나 한계가 있었기에 보고 싶은 공연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다시 돌이켜 봐도 그때는 후회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열정적이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로부터 딱 10년이 지난 지금, 평화의 전당에서 원더랜드 페스티벌을 기다리는 느낌은 다소 복잡했다. 나에게 뮤지컬은 추억이지만, 내가 빠져나간 시공간에서 뮤지컬은 여전히 계속되는 진행형의 대상이었다. 그런 뮤지컬이 나에게 낯설게 느껴지진 않을까, 내가 좋아하고 그리워했던 것들은 이제 과거의 것이고, 내가 모르는 것들로 공연이 채워져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1막 - 지금의 뮤지컬을 만나다
그렇게 마주한 1막은, 내가 떠나온 이후에도 계속 자라온 ‘지금의 뮤지컬’을 보여주고 있었다.
2015년 작품 '베어 더 뮤지컬'에서 조연으로 만났던 김려원 배우는, 이제는 주연 배우로서 여러 넘버를 깔끔하게 소화하며 무대 장악력을 뽐냈다. 조연으로도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이후가 기대되었던 배우였던 만큼, 지금 눈부시게 빛나는 그를 보면서 느끼는 소회는 남달랐다. 누군가가 등장하고 성장하고 자리를 잡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 역시 뮤지컬의 매력이라는 점을 실감했다.
이번 공연으로 처음 만났던 두 배우, 나하나 배우와 김이후 배우 역시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두 배우 모두 노래 실력은 두말할 것 없었고, 관객을 몰입시키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관객들에게 곡을 소개하고 멘트를 할 때는 떨리면서도 설레어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게 느껴졌는데,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몰입하여 달라지는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나하나 배우가 감성적이고 멜로디컬한 넘버를 선보였다면 김이후 배우는 강렬하고 임팩트 있는 넘버를 선보였는데, 그것이 뜻하지 않게 대조를 이루며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김이후 배우였다. 김려원 배우와 함께 부른 '해적'의 넘버에서, 수줍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 넓은 극장을 가득 채우던 김이후 배우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다. 뮤지컬은 무대 공연이다. 눈빛, 목소리, 가사, 몸짓, 멜로디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한꺼번에 폭발하여 무대라는 공간을 가득 채우는 순간, 그 순간은 휘발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 영원히 기억의 한 켠에 남는다. 그리고 수십, 수백 번을 재생해도 다시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게 된다.
'해적'의 넘버에서 그는 나까지 해상 모험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떨림과 강렬함을 선사했고, '포미니츠'의 넘버에서는 애가 끓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나는 그 두 작품 모두 실제로 본 적이 없는데, 긴 콘서트 중 배당된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그 작품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사랑하게 된 기분이었다. 이것이 노래와 배우의 힘이구나, 그리고 노랫말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뮤지컬의 힘이구나 싶었다.
지금의 뮤지컬은 모두 낯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배우, 낯선 작품과 낯선 넘버, 그리고 뮤지컬을 보는 게 낯설어진 나 자신. 그럼에도 그토록 뮤지컬을 사랑했던 그 시절의 나를, 원더랜드 페스티벌의 1막은 다시 불러일으켜 주었다. 배우는 바뀌었어도 무대는 그대로였고, 내가 느끼는 감정도 그대로였다.
2막 - 그리움이 환호로 바뀌는 순간
그리고 2막에서 나는 과거와 지금의 뮤지컬을 함께 마주했다.
내가 뮤지컬을 보던 시기에도 유명했던 박혜나 배우와 조형균 배우는 1막에도 무대를 했지만, 2막에서 내게 좀 더 친숙한 넘버와 함께 등장해 저절로 환호성이 나왔다. 1막에서도 눈부신 무대매너를 보여줬던 박혜나 배우가 공연장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피에로를 외치며 '위키드'의 넘버를 부르는 순간,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 후 나하나 배우와 '위키드'의 'For Good'을 부를 때는 눈물이 고였다. 최근 '위키드'를 영화로 다시 한번 만나서인지 그의 무대가 더 그립고 반가웠다.
무대 장악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장은아 배우는 등장부터 '지킬 앤 하이드'의 넘버로 무대를 강렬하게 휘어잡더니, 그 뒤에 조형균 배우와 함께 '레드북'의 대표적인 솔로 넘버인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듀엣으로 편곡해 신선함까지 보여줬다. 직접 관람했던 극은 아니지만 유튜브 쇼츠 등으로 자주 접했던 넘버라 익숙했는데, 두 배우의 하모니가 더없이 아름다워 듣는 내내 행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던 신성록 배우와 장은아 배우의 '헤드윅' 무대. 두 배우와 함께 모두가 자유롭게 일어나 몸을 흔들고 공연을 즐기는 순간, 단번에 과거의 백암아트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신성록 배우의 '프랑켄슈타인' 넘버, 조형균 배우의 '보니 앤 클라이드' 넘버도 그 어떤 무대 장치와 배경 없이도 그 공연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여기서 원더랜드 페스티벌이 단순하게 배우들이 등장해 독립적으로 각자의 넘버를 부르고 퇴장하는, 그런 공연보다는 조금 더 뮤지컬 그 자체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배우들은 솔로 넘버뿐만 아니라 각각 다양한 조합을 이루어 매력을 선보이면서도, 작품과 넘버에 맞는 의상과 무대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공연을 조금씩 맛보면서도 각 공연의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본 공연을 보는 것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뮤지컬 콘서트로서는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싶다.
공연의 마지막에, 장은아 배우가 다소 생소한 '원더랜드'라는 작품의 'Finding Wonderland'라는 넘버를 소개하며, 노랫말이 참 좋아서 들려드리고 싶었다고 할 때 앞선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아예 모르는, 들어본 적 없는 작품. 그럼에도 음악과 가사, 배우의 연기가 함께할 때 작품의 매력은 더욱 확실하게 관객에게 전달된다.
뮤지컬을 사랑했던 나는, 원더랜드 페스티벌을 통해 그 이유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여전히 진행형임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공연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오래도록 향유되기를 바란다. 순간의 예술이 영원의 감동으로 남는 경험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