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렇게나 아름답고 섬세한 피아노 - 2024 게자안다 콩쿠르 위너 콘서트

글 입력 2024.11.1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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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예술의전당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낯설었다. 항상 보러 오던 뮤지컬이나 연극이 아닌, 피아노 리사이틀을 보러 온 탓이다. 바로 2024 게자안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일리야 슈무클러'의 한국 첫 단독 공연이다.

 

 

11.13 게자안다 콩쿠르 위너 콘서트 포스터.jpg

 

 

새로운 공연을 만나게 되는 순간에는 언제나 기대감과 두려움이 함께 찾아온다. 특히나 이처럼 익숙하지 않은 장르의 공연은 더욱 그렇다. 내가 이 공연을 즐길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게다가 프로그램에 적혀 있는 바흐, 슈베르트, 드뷔시... 다 아는 이름이지만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음악계의 문외한이라 더욱 그랬다.


그렇게 콘서트홀을 밝히던 조명이 꺼지며 무대의 피아노만을 환하게 비출 때까지 계속되던 두려움은, 천천히 걸어 나온 피아니스트의 손이 건반과 만나는 순간 사라졌다. 그때부터는 온전히 그가 선사하는 음악의 바람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었다.


첫 번째로 연주된 곡은 바흐의 토카타 D장조(J. S. Bach : Toccata in D major, BWV 912).


공연장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뒤바꾸는 연주자의 능력이 십분 발휘되는 곡이었다. 부드러운 페이스 조절이 두드러지는 초반부를 지나,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는 순간 공연장은 시공간이 멈춘 듯 -내 숨소리마저 들릴까 두려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오른손과 왼손이 각각 연주하는 선율은 전혀 별개의 곡을 연주하는 듯이 귀에 또렷하게 박히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오른손과 왼손이 다시 합치되는 느낌을 받을 때는 쾌감마저 느껴졌다.


두 번째 곡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A장조(F. Schubert — Sonata in A major, D. 664 (Op. posth. 120)).


부드러운 도입부를 지나, 피아노의 고음부에서 유영하는 손가락에서 자아내는 선율은 요정의 노랫소리같이 맑고 청아했다. 잠깐 저음부에서 힘을 주었다가 부드럽게 흘러가는 흐름에 익숙해지기 무섭게, 다시 강한 음이 찾아와 지루할 새가 없다. 무대 위에 분명히 홀로 있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것 같은 다채로운 분위기를 선사했다.


두 번째 곡의 중반부에 이르자, 이 연주자의 강점이 확실히 느껴졌다. 부드러울 땐 한없이 부드럽게 피부를 간질이다가, 강할 땐 한없이 가슴을 울리는 섬세한 강약의 조절이다.

 

피아노를 쉽게 깨질 것 같은 대상처럼 조심스럽게 다루다가 한순간 강한 음을 내니, 그 격차에 관객은 정신없이 따라가게 된다. 특히 부드러움을 표현하는, 잠깐의 멈춤 뒤에 건반 위에 내려앉는 연주자의 손가락은 마치 산들바람처럼, 그 바람을 타고 잠깐 거쳐 가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후 연주된 세 번째 곡은 리스트의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F. Liszt — “Funérailles” from “Harmonies poétiques et religieuses”, S. 173 No.7)이었다.


짧게 끊기는 음의 울림이 묘하게 홀을 가득 채워 존재감을 자랑하더니,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음들도 저마다의 질감을 가지며 공간의 밀도를 높였다. 약해진 음은 마치 뭉쳐지듯 웅얼거리는 느낌이다가, 강해지는 순간 퍼져나오듯 주변을 장악해 분위기를 바꿨다. 왼손은 저음부에서 같은 음계를 반복하는 데 반해 오른손은 멜로디컬하니 불협화음처럼 느껴지다가도, 그것이 또 조화를 이루어 모순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이전까지의 곡에서 부드러움을 강조했다면, 이 곡에서는 강하게 연주할 때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핵심이다. 크레센도를 그리는 마지막 파트에서 이는 정점을 이뤘다. 연주자의 강점을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매우 영리하게 구성됐다.


인터미션이 끝난 뒤, 잠시 분산되었던 분위기를 다시금 끌어올리는 드뷔시의 ‘영상’ 제1집(C. Debussy — “Images”, book I, L. 110)이 그 다음 곡이다.


현란한 손놀림에 비해 귀가 피곤하지 않다는 것이 신기했다. 상대적으로 고음부의 선율이 흐드러지듯 귀에 내려오는데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음과 음이 끊기지 않고 이전의 음이 잔존하는 듯한 페달의 사용이 특히 매력적인데, 연주자는 그를 통해 음이 풍부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표현해냈다. 앞선 곡들과는 다른 공간감을 선사하는 연주에 마법에 걸린 듯했다.


리사이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M. Mussorgsky — “Pictures at an Exhibition”)은 뮤지컬을 보는 듯 표현력의 끝을 보여주었고, 예정된 프로그램이 끝난 뒤 두 번의 앵콜까지 관객을 만족시키기엔 넘치도록 충분했다.


피아노라고는 초등학교 때 배웠던 체르니가 다인 사람이, 대사도, 스토리도 없는, 음악만이 존재하는 피아노 공연을 보고 나서 이렇게 할 말이 많을 줄 누가 알았으랴. 그만큼 이 공연에는 울림이 있었다. 공연은 그 대상을 잘 모르는 사람까지도 즐길 수 있기에 가치가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된 계기였다.

 

피아노, 이렇게나 매력적이었구나.

 

 

 

유지현.jpg

 

 

[유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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