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는다는 신념 자체를 맹목적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내가 그렇다. 이들은 종교가 없거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무신론자다. 어떤 이들은 ‘당연히’ 신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나를 포함한 믿지 않는 이들 또한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은 없다고 믿는다. 신에 의지하며 사는 건 가족과 성장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모태신앙(母胎信仰 : 어머니의 태 안에서부터 물려받아 믿게 된 신앙)’이 그렇다. 믿지 않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믿는 것보다 다시 태어나는 게 더 쉬운 사람들이다.
2025년 11월 29일 서울 GS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라이브 온 스테이지 <라이프 오브 파이>엔 ‘믿음’이란 관념을 두고 대립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가족·동물원의 동물들과 함께 캐나다로 떠나던 중 폭풍을 만나 227일간 바다에서 표류한 소년 ‘파이’, 파이의 생존에 얽힌 비밀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보험사 담당자 ‘오카모토’다.
파이는 믿는 종교만 세 개인, 열린 마음을 가진 소년이다. 그는 채식주의자이며, 어릴 때부터 함께 성장해 온 동물원의 동물들을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파이는 동물원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가 데려온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에게 강한 호기심과 이끌림을 느낀다. 하지만 아버지가 미끼로 집어넣은 염소 ‘버킹엄’을 리차드 파커가 잔인하게 잡아먹는 순간부터 파이는 그를 증오한다.
가족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캐나다로 떠나게 되지만 새로운 인생에 대한 희망도, 삶도 폭풍우와 함께 바닷물에 잠겨 버린다. 혼자가 된 파이는 함께 살아남은 리차드 파커와 227일간 표류하다 해안가에 다다른다. 파이는 신들을 믿었고, 증오하던 리차드 파커마저 믿게 되며 그를 사랑하게 됐다. 파이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절망과 지독한 고독 속에서도 희망을 믿으며 구원받았다. 파이를 살린 생명줄은 믿음과 사랑이었다.
집요하고, 끈질기고, 계산적인 오카모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보험사 담당자란 직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격 구조 자체가 불신과 냉소로 가득하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다. 죽다 살아난 파이가 이야기를 힘겹게 털어놓으며 괴로워할 때조차 오카모토는 차갑다.
파이는 다리 다친 얼룩말 ‘블랙 앤 화이트’, 엄마 오랑우탄 ‘오렌지주스’, 하이에나와 함께 겨우 배에 탔지만,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모두 죽였다고 말한다. 그 후 나타난 호랑이 리차드 파커를 호루라기 하나로 길들이고, 227일간 공존을 이어가다 그와 함께 땅을 밟았단 이야기를 오카모토는 믿지 않는다. 논리, 근거, 개연성, 확증을 종교 대신 믿어온 그에겐 파이의 말들은 터무니없는 거짓일 뿐이다.
그럼에도 오카모토의 불신과 냉소엔 조금씩 균열이 인다. ‘누군가는 복권에 당첨된다’, ‘합리적인 것만 따지다 우주를 놓친다’는 파이의 말들 때문이다.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의 표류기 이후 파이가 털어놓은 충격적인 이야기는 오카모토의 신념을 뿌리째 뽑아버린다.
파이와 배에 함께 올랐던 동물들은 인간을 비유한 것이었다. 인간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살해했으며, 타인의 살을 먹기까지 했단 파이의 이야기는 지옥도였다.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한 파이는 손에 피를 묻히고, 복수와 생존을 위해 죄를 지으며 살아남았다. 굶주림과 공포, 생존 본능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고 미쳐간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 아닌 짐승이었다.
동물이 동물을 잡아먹고, 소년과 호랑이가 공존하며 함께 살아남은 것.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고 소년은 끔찍한 고통 속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것. 둘 중 어느 이야기를 믿고 싶을까. 아름다움과 희망에 대한 믿음, 상상력이라곤 씨가 말라버린 오카모토조차 전자를 택한다. 파이를 추궁하던 오카모토는 그의 아픔에 유감을 표하며, 보고서에 동물 이야기를 기록한다.
신을 믿는 것만큼이나 살생을 하지 않는단 신념도 충실히 따랐던 채식주의자 파이. 조난된 그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물고기와 바다거북을 먹었다. 또한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살생을 하며 손에 피를 묻혔다. 그가 택한 건 생을 향한 강렬한 의지와 믿음이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몸집을 순식간에 불려버린 목숨 같은 믿음이 본래의 신념을 이긴 것이다.
오카모토 또한 마찬가지다. 숫자, 현실, 논리,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신은 없다는 사상을 믿으며 산 오카모토는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파이 이야기’를 믿기를 선택한다. 그게 힘겹게 삶을 지켜낸 파이에 대한 예의이자 인류애였고, 고통 속에서 떠난 이들을 향한 애도였기 때문이었다. 죽음마저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답고 소중한 삶이 두 사람을 바꾼 것이다.
얀 마텔 소설 원작 <라이프 오브 파이>는 리안 감독이 만든 동명 영화에 이어 공연으로도 만들어지며 큰 사랑을 받았다. 2025년 말 한국에도 상륙한 작품은 박정민과 박강현이라는 실력과 인기를 두루 갖춘 배우 캐스팅, 실제 동물 움직임과 유사한 퍼펫 티어들의 섬세한 연기, 예술의 영역에 당당히 자리한 환상적인 무대 연출로 연일 화제다.
이처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는 ‘라이브 온 스테이지’란 이름을 달고 스스로 연극이길 거부한다. 그럼에도 <라이프 오브 파이>는 좋은 연극이 갖춰야 할 덕목을 갖고 있다. 꽉 닫힌 결말을 보여주며 후련하게 극장을 나서게 하는 게 아닌, 찜찜하지만 생각할 거리와 토론 주제를 제공한단 점에서 그렇다. 쏟아지는 텍스트의 향연이 배우들의 입에서 관객의 입으로 전해지며 오래 머무른다면, 그 무대는 성공한 무대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자리에 따라 보이는 광경이 다른 작품이기도 하다. 1층 앞자리에 가면 배우와 퍼펫 티어의 움직임·연기는 잘 볼 수 있지만, 작품의 백미인 바닥 연출은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2, 3층에 가면 무대 연출은 한눈에 볼 수 있지만, 배우의 디테일한 연기를 보기엔 아쉬울 것이다. 객석 위치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듯, 우리의 인생도 어떤 길을 걸어왔느냐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게 다를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와 오카모토가 그렇다.
<라이프 오브 파이>와 더불어, 무신론자들에게 믿는 이들의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있도록 쓰인 작품은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6.25 전쟁 중, 무인도에 함께 갇히게 된 남북 군인들이 고통을 견디려 가상의 ‘여신님’을 만들어내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위기를 넘기기 위해 얼렁뚱땅 만들어낸 여신님은 그들의 마음속에선 진짜 위안이 되고, 어느 순간엔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 파이가 자기 자신, 믿음을 상징하는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표류하다 생존한 것처럼, <여신님이 보고 계셔> 여신님 또한 아픔과 그리움에 잠식된 이들에겐 피부에 와 닿는 온기가 됐다.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살아가게 될지라도 파이는 생존했다. 터무니없을지라도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이에게도, <여신님이 보고 계셔> 군인들에게도 상상, 환상, 강력한 스토리텔링의 힘은 진통제이자 환각이 됐다. 그 환각은 적어도 그들에겐 ‘진짜’다. 그들이 그렇다면 그게 맞는 것이다. 삶이란 고통을 견디기 위해선 누구에게나 각자만의 진통제와 환각이 필요하다. 그 진통제의 이름은 희망, 그리고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