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Opinion] 좁은 지면 너머 아득히 넓은 세상을 선사하는 단편집 4선 [도서/문학]

사랑할 법한 '엮어 만든 이야기'들

by 김그린 에디터
2026.01.03 09:54

 

 

소설의 본질은 이야기이며, 이야기의 본질은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살아 본 적 없는 시간과 공간. 살아 본 적 없는 삶. 겪어 본 적 없는 일들과 느껴 본 적 없는 감정들. 원래대로라면 숨이 다하는 날까지 결코 경험해 보지 못했을 세상을 감각하게 해 주는 것.


독특하게도, 호흡이 길고 방대한 장편소설보다 짤막한 중단편의 모음으로부터 더 큰 세상을 느끼는 습관이 있었다. 할당된 지면은 좁지만 그래서 도리어 더 나의 세상을 아득히 넓혀 주었던 이야기들. 그 작은 지면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공간만큼이나 광대한 세상을 선사해 주었던 작품들에 관해 쓰고 싶다.

 

 

131.jpg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우리 시대의 가장 정교한 SF 단편집 중 하나라 해도 섣부르지 않다. 표제작 는 영화 <컨택트>의 원작이 되기도 했다.

 

속 모든 시간과 순간은 일직선의 구도로 흘러가지 않고 원형으로, 산발적으로 배치된다. 외계 지성체 ‘헵타포드'의 시간관처럼. 그들이 쓰는 언어처럼. 헵타포드를 만난 이후의 순간들과 헵타포드 이전 딸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뒤죽박죽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야기는 점차 거대한 하나의 원형이 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는 사라진 채 마침내 모든 순간이 모든 순간과 한자리에서 맞닿는다. 이 이야기는 가장 과학적인 SF이며,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SF이다.


<바빌론의 탑>, <지옥은 신의 부재>,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등 함께 수록되어 있는 다른 단편들 역시 저마다 하나의 거대하고 대체 불가능한 세계를 선사한다. 종교적 상징과 우화와 철학이 물리학과 수학과 뇌과학을 만나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다.

 

 

<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가장 전통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판타지. 낱장 속 펼쳐지는 이야기들의 배경은 오래된 고전으로서의 무게감을 풍기고, 그 이야기의 방향은 저 멀리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미래까지 쭉 펼쳐져 있다. 국내에서는 열여섯 번째 수록작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방탄소년단의 <봄날> 뮤직비디오 속에 상징적으로 등장하며 다시금 화제가 된 바 있다.

 

<파리의 4월>, <샘레이의 목걸이>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들은 낭만, 그것도 남용되어 원래의 빛을 잃은 단어로서의 낭만이 아니라 원형으로서의 진실한 낭만이라는 단어에 완벽히 부합하는 세계를 그려낸다. <땅속의 별들>에서 어슐러 르 귄은 ‘사람들 사이에서 SF는 미래에 실현 가능한 또는 불가능한 기술적 장치를 소재로 해서 뒤죽박죽 널리 꾸며낸 이야기로 알려져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SF를 말하는 것은 캔자스 주만 가지고 미국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말한다. 어슐러 르 귄의 이야기는 그*의 말마따나 실제 시간대, 즉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이야기가 아닌 심리적 신화에 가깝다. 그 신화 속에서 ‘과학은 예술과 동의어이다’. 나는 이 말이 퍽 마음에 든다.


* 어슐러 르 귄은 여성이다. 본래 한국어의 삼인칭 대명사 ‘그’ 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범용적 지칭어였기에 ‘그’를 사용하였다.

 

 

<여자들의 왕>, 정보라

 

타고난 이야기꾼, 능숙하다 못해 정련된 서술가, 쓰는 자이자 저항하는 자인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 공주, 기사, 용, 그리고 탑이 나오는 전통적인 판타지가 담대하고 무심하며 인간적인 여자들의 뒤를 쫓아 진행된다. 문장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여간해서는 마침표, 그 다음 마침표, 그 다음 마침표를 보기 전까지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신기한 작품이다.

 

‘작가의 말’에는 원시불교와 성경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의 상징,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3국의 문화적 형상 등 작품의 구상 배경이 된 요소들이 나와 있어 또 하나의 단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현재는 절판되어 대다수의 도서 판매처에서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작은 서점의 소장 서가, 도서관, 친구나 지인의 집 등지에서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책, 누군가의 손을 탄 책으로만 만나볼 수 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데이비드 미첼

 

여러 개의 중단편이 수록된 모음집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의 거대한 장편으로 읽을 수도 있는 책. 소설의 본질에 가장 충실한 이야기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살아 본 적 없는 시간과 공간, 살아 본 적 없는 삶 속으로 뛰어들 수 있게 한다.

 

서로 다른 시대의 서로 다른 사람 여섯 명의 이야기는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하나의 기점을 중심으로 대칭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숫자로 말하자면 1, 2, 3, 4, 5, 6. 그리고 다시 6, 5, 4, 3, 2, 1. 그 ‘기점'을 지나며 전혀 접점이 없을 것만 같았던 여섯 갈래의 이야기는 촘촘하게 엮이며 시공간을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장편이 된다.

 

‘다른 세상의 경험'을 찾아 책을 펼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꽃다발 같은 작품이다. 도통 엮일 구석이 없을 것만 같은 서로 다른 세상들을 하나로 완벽하게 묶어 선사하는 책. 말하자면 19세기 태평양을 항해하는 미국인, 낭만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방탕하다고도 할 수 있을 순간을 만끽하는 1930년대 벨기에의 작곡가, 디스토피아가 된 한국에서 살아가는 복제인간, 모든 문명이 스러진 이후 ‘하와이였던’ 땅에서 살아가는 양치기의 이야기 등을 단숨에 모두 겪어 볼 수 있게 하는 책.

 

이처럼 엮어 만든 이야기들을 사랑한다. 부분의 합은 결코 전체와 같지 않음을 일러 주는 이야기들. 자칫 한없이 좁았을 수도 있었던 나의 세상은 그들의 작은 지면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한없이 트인다.

 

 

김그린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Opinion] 아무도 잠들지 말라, 이 순간은 오직 당신만 목격할 수 있으니 - 슬립노모어 서울 [공연]
  2. 02 [Opinion] 바야흐로, 밴드의 시대 [음악]
  3. 03 [Opinion] 이번에는 정말 다를 것만 같은 사랑 이야기, 뮤지컬 '하데스타운' [공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