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설보다 가을, 가을보다 실험영화 같은 삶 [도서/문학]

실험영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
글 입력 2023.10.3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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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에는 서늘한 바람이, 발아래로는 파삭한 낙엽이 즐비한다. 가을과 겨울 사이를 나른하게 걸치고 있는 나날이다. 가을이 다 가버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소설 보다 : 가을 2023』 읽기. 『소설 보다 : 여름 2023』으로 오피니언을 쓴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 찾아왔다. 그동안 시간도, 내 성장도 좋은 방향으로 흘렀길 바라며 『소설 보다 : 가을 2023』에 수록된 전하영 작가의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를 펼쳐본다.




사회의 개념적 공격과 숙희의 사랑



마흔아홉의 작가 숙희는 더는 새로울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서부터는 눈을 감았다 뜨면 몇 년이 훌쩍 지나 있다. 나이가 들었다는 건 당황하는 일이 적어졌다는 뜻이고, 다른 말로는 “어떠한 상황이든 지난 과거의 삶 속 어느 순간을 다른 식으로 반복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 숙희가 윤미로부터 괌에 한 번 오라는 말과 함께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윤미가 손녀, 즉 딸 주원이 낳은 아이 제인이를 돌보기 위해 주원의 거주지인 괌에 가 있다는 것이다. 숙희는 문득 생각한다 “윤미는 이제 할머니구나.” 숙희보다 두 살 어린 윤미가 할머니가 되었다는 것, 그 말인즉슨 숙희 또한 제인에게 할머니인 셈이었다. 그러나 숙희는 ‘아줌마’라는 호칭에 무감해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당황스럽기만 하다.


 

편의점 측에서 연령대에 따른 소비자 구매 기호를 데이터화하려는 음흉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을 갖출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마음만은 백 퍼센트 순수 청년이었던 숙희는 그날부터 누군가에게 자신이 중년 여성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현실에 눈을 떴다. 일거수일투족이 이제부터는 사회적으로 다른 카테고리로 수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짧은 순간의 타격은 숙희에게 있어서 아주 거대한 ‘엔터’였다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젖힌. 즉, 아줌마라는 세계로.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중


 

그렇지만 숙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할머니에 대한 저항감이 치밀어 오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스스로 무장해제 하는 듯한 그 묘한 연약한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다. 칠십대면 칠십대 여성이라 하고, 팔십대면 팔십대 여성이라 지칭하면 될 것이지, 그도 아니면 서양식으로 이름을 부르든가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고 아무에게나 할머니라고 대충 불리고 싶진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숙희 어린이’와 비슷한 어감으로 ‘숙희 할머니’하고 자신을 부르며 제멋대로 친근한 척 이래라저래라 선을 넘어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다.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중

 


숙희는 살아오면서 겪은, 앞으로 겪어야 하는 개념적 공격에 불만을 가진다. 어린이, 아가씨, 아줌마, 할머니와 같은 특정 나이대에 통용적으로 지정된 명칭은 막상 맞닥뜨린 사람 입장에선 당황스럽고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본인의 나이와 신체 변화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상 말 그대로 개념적 ‘공격’이기 때문에 이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간주된다. 초등학교에서 어린이, 하고 불리거나 아르바이트 도중 아가씨, 라고 불리거나 친구에게 손녀가 생겼다는 이유로 할머니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아줌마, 할머니 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 세계로 진입했다는 생각이 들면 위기감과 불안마저 느껴진다. 


숙희가 이러한 감정을 특히 더 강렬하게 느끼는 건 열여섯 살 어린 연인 찬영을 만날 때이다. 할머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는지 숙희는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찬영을 집으로 불러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딜 가나 눈길을 끄는 커플이었다. 매번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라다녔다. (……) 길거리에서 팔짱을 끼고 가다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그것이 때때로 위협적일 만큼 눈길을 끈다고 느껴질 때면 숙희는 마치 찬영의 친누이, 혹은 막내 이모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서 반걸음 떨어져서 성적인 늬앙스를 탈락시킨 채 그 옆에 무감하게 서 있곤 했다.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중

 


숙희는 밖에서 찬영과 함께 다닐 때 주위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을 넘어 가족인 척 그들 사이의 늬앙스를 바꾸기도 한다. 어린 연인을 둔, 혹은 어린 여성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년 남성의 시선이 담긴 작품은 소설과 영화에서 많이 다루어졌으나 어린 연인을 둔 중년 여성의 시선은 많이 봐오지 못했다. 전자의 경우 남성의 능력이나 그가 받는 부러움이 강조되는 한편 후자는 숙희가 느끼는 감정에서 알 수 있다시피 끝없는 자기 검열과 자기 객관화에 빠진다. 찬영이 자신보다 한참 어리다는 사실에 숙희는 우월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신숙희, 너 자꾸 어쩔래”라며 스스로를 탓한다.




인생의 ‘정상적’인 루트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는 숙희이지만, 한창 에너지 넘치는 시절이 있었다. 과거 숙희는 쫓기듯이 성급한 성적 욕구를 지닌 채 “누구든 간에 실수로라도 아이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다. 혹여나 아이가 생긴다면 상대에게 밝히지 않고 아이를 키울 작정으로 여러 남성과 잔다. 


 

아이가 있는 삶, 어머니로 살아가는 삶. 그 가상의 플롯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된 것이었다. 그건 숙희가 발명한 것도, 숙희만의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회적 의무와도 같은 선택지로서, 제대로 된 티켓을 구하지 못한다면 억지로라도, 심지어 절차를 어겨서라도 반드시 그 물결에 올라타야만 한다고 여겨졌던 길이었다.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중

 


당시의 숙희는 어떤 의무감과 압박에 휩싸여있다. 당시라고 해도 사십 대 초반이었던 숙희는 고령 임신·출산에 속하는 나이다. 여성은 일정 나이대에 접어들면 결혼 후 임신과 출산을 거쳐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다. 규정된 법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처럼 이러한 과정을 여성의 정상적인 삶의 루트라고 본다. 루트 밖의 사람들은 루트대로 나아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불안과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나도 얼른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할 것 같다는 조급함, 그러지 않으면 정상적이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걱정. 애초부터 루트 같은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동떨어진 기분이 든다.


불안의 근원은 신체적인 조건 차이도 있을 것이다. 숙희가 사십 대 초반에 그랬던 것처럼 여성은 특정 나이대를 지나면 더는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없다. 루트에서 벗어나 있다는 삶도 불안의 불씨지만, 이 시기를 넘기면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다는 불가피한 신체적 조건 또한 많은 여성에게 ‘정상적’인 삶을 재촉한다. 이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생물학적인 자식을 갖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하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 거대한 강이 있는데 시간의 제약 없이 언제든지 저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저쪽으로 갈 일이 없을 거라 여기면서도 어느 시점이 되면 완전히 길이 막혀버린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그들이 과연 같은 세계에 속하는 부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중

 

 

숙희 집에 며칠 있어도 되냐는 찬영의 부탁에 숙희는 대뜸 괌에 가기로 했다고 말한다. 괌에 갈 생각도 계획도 없었지만, 숙희는 찬영과의 관계를 끝내기로 결심하고 그를 놓아주기로 한다. 


 

숙희는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중


 

숙희는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적으로 안다. 어떠한 상황이든 과거의 일을 반복하는 듯한 기분에 빠져 사는 숙희였지만, 더는 자기 검열과 자기 객관화, 위협적이고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는 사랑은 하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숙희가 잃어버린 온갖 것들과 실험영화



숙희는 찬영 덕분이라 해야 할지 탓이라 해야 할지 어찌 되었든 괌 행 비행기에 올라 윤미의 손녀 제인이를 만난다. 이제 막 8개월이 된 제인이를 받아 안으며 숙희는 기쁨을 느낀다.


 

숙희의 마음속에서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기억이 다시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숙희가 사랑했던 그러나 잃어버린 온갖 것들에 대한 기억이. 다시 삶을 달라고. 다시 자기를 봐달라고. (……) 숙희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기쁨이었다.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중

 


숙희는 어째서 기쁨을 느낀 것일까. 숙희가 잃어버린 온갖 것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윤미의 SNS에 올라온 제인이의 영상을 보고 “역시 아기란 성가신 존재”라 생각하고, 친구도 없이 괌에서 하루종일 아이만 돌보는 윤미를 무척이나 불쌍하게 여긴 숙희였다. 전하영 작가에 의하면 숙희가 잃어버린 온갖 것들은 “숙희가 사랑을 주었던 대상”이라고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숙희가 미혼을 유지하며 산다고 해서 임신과 출산을 거부하고 아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 터다. 언젠가의 숙희는 그것을 바랐을 수도, 사랑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할 수 없게 되었거나 혹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임신을 바랐던 순간이 그렇고, 이별한 찬영이 그렇듯 말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제인이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마주하게 된 숙희는 벅차오르는 기쁨에 눈물이 날 듯하다.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라는 제목은 작가가 동아일보 1979년 1월 24일 자에 실린 유현목 감독의 소설 「어느 훗날」의 한 대사에서 가져온 것으로 사실상 소설의 내용과는 큰 연관이 없다. 소설 중간에 찬영이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하며 실험영화를 언급하기는 하나, 서사적인 연결점은 부족하다. 그러나 자유분방하고 정해진 틀이 없는 동시에 감독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드러나는 실험영화라는 장르를 떠올려보면 자유롭게 살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확고하게 지켜온 숙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이 있을까 싶다. 



[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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