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세계 [도서/문학]

조중균, 그리고 우리의 세계
글 입력 2023.07.2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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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 김금희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의 모든 단편을 다룰지, 아니면 그중 하나를 구체적으로 다룰지 고민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읽은 「조중균의 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생 때는 문예창작학과 입시 준비를 위해 인물 중심의 소설을 쓰는 방식에만 집중했었다. 지금 이 작품을 다시 읽어보니 고등학생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였다. 조중균, 강해란, 화자 영주의 관계와 세 사람이 각자 삶을 살아가는 형태, 즉 그들의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너무 한낮의 연애』를 다 읽은 후 망설임 없이 「조중균의 세계」를 택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와 분명 닮아있을, 세 사람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조중균의 세계

 

 

“(……) 삼 년을 있어도 조중균씨는 융화가 안 돼. 문제가 많거든.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하거든.”

 

「조중균의 세계」 중

 


조중균이 다니는 회사의 부장은 그를 이렇게 정리했다. 출판 회사에서 교정직을 담당하고 있는, 마흔이 훌쩍 넘은 조중균은 부장의 말대로 자기 세계가 강하다. 출근하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교정 작업이 없을 때도 국어사전을 읽고, 점심시간에는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다른 직원들을 뒤로한 채 홀로 사무실에 남는다. 이런 모습들은 조중균의 세계는 강한 것 같지만 조중균이라는 사람 자체가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중균이 이 출판사에서 ‘약자’라는 사실은 그가 구내식당에서 밥을 안 먹는 대신 식대를 돌려받게 된 사연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조중균씨가 셔츠 앞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 날짜가 있고 그 옆에는 “나는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이 쓰여있었다. 마지막 칸은 확인자가 서명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조중균씨는 점심시간에 식판 대신 그 수첩과 볼펜을 들고 정수기 옆에 서서, 본부장이 식사하러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 조중균씨는 사인을 받은 뒤에도 올라가지 않고 식당 문을 닫을 때까지 선 채 자신이 정말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조중균의 세계」 중

 


회사에는 점심을 먹지 않는 대신 식대를 돌려받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조중균은 본부장을 찾아갔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않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는 본부장의 말에 조중균은 위와 같은 방법을 선택했다.
 
한 번 상상해 보자. 300명가량의 회사 사람들이 몰려드는 구내식당에서 정작 본인은 하릴없이 본부장을 기다렸다가 “나는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 옆에 사인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을 매일 하는 대신 한 달에 구만 육천 원을 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에둘러 말한다면 알림장에 부모님의 사인을 받아 가야 하는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겠지만, 실상은 초등학생 이후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짓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본인보다 훨씬 어리지만 직급은 높은 이들을 앞에 두고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수치를 넘어 인간적인 모욕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조중균은 그것을 진드근히 해낸다. 막상 본인은 이것이 마땅한 절차라는 듯 정수기 옆에 가만히 서서 본부장을 기다렸다가 사인을 받는다. 정식 절차로 포장된 이 모욕적인 시스템은 본부장이 조중균의 점심 식사 여부에 점차 신경을 쓰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레 사라진다. 만약 본부장이 계속해서 사인한다고 할지라도 조중균 또한 계속 구내식당으로 내려갈 것이다. 아니, 이미 한참 전에 받아들인 상태이므로 이제껏 그랬듯 부끄러워하지 않고 매일 수첩을 들고서 구내식당으로 향할 터다.

조중균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상하게 남들이 부끄러워할 만한 상황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남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을 상황에서는 부끄러워한다.

 
강의실로 들어가자 감독관이 빈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소문대로 칠판에는 시험문제가 적혀 있지 않았다. 이름만 적으라고 감독관이 말했다. (……) 그리고 여기 빈 종이 앞에서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는 조중균씨가 있었다. 왜 문제가 없지, 하고. (……) “이 친구, 다른 문장을 적으면 안 돼. 이름만 적어, 이름만 적으면 점수 준다니까.”
 
또 빈종이가 놓였다. 조중균씨는 다시 볼펜을 잡았다. 나중에는 친구들까지 “이름만 적어, 중균아. 유급하면 군대 간다” 하고 말렸다. 하지만 조중균씨는 문장을 끝까지 적었고 마지막 순간에도 이름은 적지 않았다.
 
「조중균의 세계」 중
 

대학 시절 이름만 적으면 점수를 준다는 역사 수업에서 조중균은 친구들과 달리 이름을 적지 않는다. 강의실의 모든 학생으로부터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 속에서도 조중균은 굳세다. 끝까지 다시 볼펜을 잡는 모습에서는 어떠한 열정과 의지가 느껴진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조중균씨는 부끄러웠다. 여기에 이름을 적고 가만히 기다리라는 교수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조중균의 세계」 중

 


감독관과 친구들의 만류에도 고집을 꺾지 않은 이유를 조중균은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시험장 소동에선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으면서 이름만 적으면 되는 빈 시험지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조중균이 부끄러워하다니. 이 일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학생 때 조중균씨는 데모를 하다가 경찰서에 붙들려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다 며칠 만에 풀려났는데 형사가 목욕이나 하고 들어가라면서 오천원을 셔츠 주머니에 꽂아주었다는 것이다. 조중균씨는 그게 참을 수 없이 모욕적이었다고 말했다. (……) 아무튼 그뒤로 조중균씨는 셔츠 주머니에 늘 돈을 가지고 다녔다. 그때 그 형사와 마주치면 이자까지 해서 갚을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이만원은 모욕을 되갚겠다는, 복수를 잊지 않겠다는 일종의 증표였다.
 
「조중균의 세계」 중
 

조중균은 형사로부터 받은 목욕비 오천 원에 ‘모욕’을 느낀다. 겉으로 보면 위로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오천 원은 사실상 ‘무시’이다. 당시는 정권에 맞선 민주 항쟁이 한창이던, 특히 학생들의 시위가 크게 이루어지던 때였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그들이 집회를 열든 길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내든 학생은 그저 학생일 뿐이라고 여긴 것 같다. 기성세대에 비해 힘과 권력이 없는 상대라고 말이다. 형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목욕이나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조중균에게 오천 원을 건넨 게 아닐까 싶다. 목욕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조중균에게는 무시이다. 조중균은 집회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조중균이 들었던 역사 강의 교수는 수업 절반 이상을 야당과 데모대 욕하는 데 허비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시험지에 이름만 적으라고 하니 조중균의 입장에서는 교수가 학생들을 시험장에 묶어둔 채 이름뿐이 적지 못하는 존재로 취급하고, 그들이 낼 수 있는 목소리와 쓸 수 있는 생각을 차단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중균의 세계는 본인만의 ‘기준’이 확실한 곳이다. 조중균이 생각하기에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것이고 부끄럽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 그것에 대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진 조중균의 세계에서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조중균은 본인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착실하고 묵묵히 해나간다. 어떨 때는 부장의 말대로 ‘강하게’ 밀고 나간다.
 
부장이 한 말의 맥락은 그 강함이 아니겠지만, 어찌 되었든 맞는 말이다. 조중균의 세계는 강하다. 조중균의 기준과 경계가 단단하게 세계를 받치고 있다.

 
그때 그 시험장에서 쓴 시 제목은 ‘지나간 세계’였다. 형수씨 말로는 그 당시 집회나 학회실이나 엠티에서 어떤 시보다도 자주 낭송됐다고 했다. 그런 ‘전단시’들은 사람들을 선동하는 효과가 있어서 그런 게 없으면 데모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는데 조중균씨의 「지나간 세계」야말로 그런 불쏘시개 역할을 잘해주었다는 것이다. (……) 조중균씨는 그 시는 자기가 썼지만 자기 시는 아니라고 했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자기 이름을 붙여 자기가 쓴 것처럼 연단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낭송할 수 있었으니까.
 
「조중균의 세계」 중
 

조중균은 시험지에 이름 대신 「지나간 세계」라는 시를 썼다. 학생들의 무력을 강조했던 시험장에서 불쏘시개 같은 ‘힘과 용기’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누군가의 눈에는 시에 불과한 그것이 학생들에게는 같은 뜻을 지닌 사람을 모으고 더 나은 세상으로 한 발 내디딜 용기를 준 것이다.
 
확실한 기준이 있는 조중균의 세계에서는 외부자의 침범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조중균의 세계가 모두의 세계이길 바란다. 자신이 쓴 시이지만 누구든 자기 이름을 붙여 어디에서든 낭송할 수 있다고 했듯이 조중균의 세계 속 기준이 또 다른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면, 조중균은 얼마든지 출입을 허가한다.
 
조중균의 세계 한편은 그래서 말랑하기도 하다. 조중균은 언젠가 그때 그 형사를 마주칠 순간을 대비하여 이자까지 친 이만 원을 항상 주머니에 넣어 다닌다. 30년 전에 본, 얼굴만 아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조중균은 복수를 꿈꾼다. 일종의 순수한 희망과 닮아있는 복수를. 언젠간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꾸밈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녹색 지폐 두 장이라는 그 실체는 조중균의 어떤 순수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여태까지 회사에서 이름만 바꿔가며 「지나간 세계」를 쓰는 행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영주와 해란의 세계


출판사에 신입으로 입사한 화자 영주와 해란은 수습 기간 후 한 명이 정식 사원으로 채용되는 경쟁 사이이다.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로 치면 대학원을 나와 아동서 편집을 맡은 경력이 있는 화자가 더욱 가능성 있겠지만, 해란은 수많은 아르바이트 경력을 내밀어 꼰대인 부장의 눈을 사로잡는다.

 
“(……) 그러니까 우리 영주씨는 말 그대로 버젓한 경력, 응? 정식 회사에서 일한 경력으로 이 자리에 왔고 말하자면 팩에 든 고기지. 원래 생산할 때부터 정식 팩에 든 고기. 해란씨는 주먹고기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어. 목살 근처 아무 살이나 주먹구구식으로다가 막 썰다보니까 어, 제법 이게 어엿한 상품이 돼 있는 거 말이야. 주먹고기, 내가 비유가 이렇게 좋아. 주먹고기 좋아하나?”
 
「조중균의 세계」 중
 

부장의 비유처럼 화자의 세계는 이제껏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팩 안에서 남들만큼의 과정을 밟아왔다. 그 때문인지 다른 사람을 향한 생각과 판단 또한 팩 안에 머물러 있다.

 
인사한 효과가 있으려면 이름을 딱 붙여야 한다. (……) 직장에서는 사소한 인사도 병기도 기술인데 저 나이 되도록 사회생활 헛했군, 헛했어. 비록 수습사원이지만 그런 조중균씨를 보니 어깨가 펴지며 어딘가 자신감이 붙었다.
 
「조중균의 세계」 중

 
아침에 늘 일찍 오더니 청소도 하는구나. 그런 거 소용없는데. 그런 성실성을 높이 사주던 낭만적인 상사들은 이미 나이를 먹어 은퇴하고 요즘 상사들은 그런 것, 바지런한 청소 아줌마를 고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영역 말고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는 직원들을 원한다. 대게는 외국어. 나는 괜히 일찍 나와서 그러지 말고 외국어 강의나 들으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조중균의 세계」 중


화자는 ‘젊은 꼰대’ 같은 모습을 보인다. 사회생활의 질서와 제도를 타인에게 갖다 대어 그들을 이리저리 따지고 판단한다. 물론 화자가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이 보편적인 지점이므로 화자가 틀렸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그 밖으로 나가거나 그 밖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화자의 세계는 팩 안에 든 고기와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직급이 없으면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사람을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건가요?”
 
“선생은 아니지. 선배도 애매하다, 나이 따라 선후배 정하면 김대리, 서대리도 조중균씨한테 선배라고 해야 해. 그런데 직급상 상사 아냐? 해란씨가 조직을 몰라서 그래. 그렇게 하면 안 돼. 회사는 그런 거야.”
 
「조중균의 세계」 중

 
“나쁘다. 그러면 도용이잖아요.” 내가 그렇게 툭 던지자 형수씨는 흥분했다. “애 좀 봐라, 우리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어, 시는 그런게 아니었어. 중균아, 얘들이 모른다, 우리 세계를 몰라.” “우리도 알아요.” 해란씨가 발끈하며 말했다. (……) “해란씨는 압니까?” 조중균씨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어딘가 좀 젖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알아요. 안다니까요.”
 
「조중균의 세계」 중


부장은 고생해서 재바른 건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고 해란을 평하지만, 막상 해란은 이런저런 살을 단단하게 뭉친 주먹고기처럼 팩 밖의 세상을 당차게 거닌다.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조중균의 호칭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진 사람도 해란이다. 해란은 조중균을 조중균 씨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다며 회사의 직급보다는 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우선시한다. 조중균 씨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조중균 그 자체로 대하는 것이다. 해란은 본인이 아주 어렸거나 혹은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그 시기를 마치 겪어본 사람처럼 몇 번이고 강조한다. 조중균의 세계를 안다고 말이다. 여기서 해란의 ‘안다’는 학창 시절 역사 수업과 미디어를 통해 민주 항쟁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했다는 뜻이 아니다. 조중균을 그 자체의 존재로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알든 모르든 조중균의 세계에 공감한다는 것이다.

해란의 ‘감정과 공감’은 그녀의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조중균의 형사 에피소드에 그 형사를 꼭 만나게 될 거라며 용기와 위안을 주고,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조중균의 이야기가 참 슬프다며 훌쩍이고, 화자가 본가가 어디냐고 물었을 때 언니가 그런 거 묻는 거 처음이라며 괜스레 감동한다.
 
해란의 이런 감정적인 공감은 어린 나이에 사회로 던져졌을 때 나타나는 ‘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회사라는 커다란 사회를 겪어보지 않았고 불편한 인간관계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르기 때문에 자연스레 비추어지는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정글이라고 불리는 회사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을 모른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면모는 조중균의 순수함과 어느 정도 닮아있다. 어떠한 것에 대한 막연한 믿음과 바람, 희망을 품는 순수함이 그들의 세계에는 있다. 조중균과 해란은 서로 그것을 느낀 게 아닐까. 그래서 해란이 가져온 쉰내가 나는 떡을 조중균은 홀로 꼭꼭 씹어 먹고, 해란은 냅다 조중균의 세계를 안다고 외친 것일지도 모른다.
 
 

조중균과 해란과 영주, 그리고 우리의 세계


 
조중균씨는 수첩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뭔가를 적은 다음 내밀었다. 날짜 옆에 괄호로 “두시 이십분”이라고 적혀 있고 “나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 나는 적고 싶지 않았다. 나는 굶은 사람을 정수기 옆에 한 시간 동안 세워놓은 본부장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니까. 그런 일들과는 무관한 사람이니까. (……)
 
“제가 할게요. 제가 해도 되죠?”
 
해란씨가 볼펜을 집어서 절뚝거리며 내 자리로 왔다. 그리고 “나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을 잠깐 읽고는 옆에다 강해란, 이라고 적었다.
 
「조중균의 세계」 중
 

조중균의 섬세한 교정 작업으로 인해 노교수의 개정판 출판이 자꾸만 미루어진다. 결국은 노교수가 출판사를 직접 찾아오는 사태가 벌어지자 부장은 조중균의 작업량을 시간대별로 확인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조중균은 또 한 번 수첩을 통해 확인 사인을 받아야 하게 된다.

조중균의 세계 한편은 여전히 약자에 위치해있다. 정밀하게 교정한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회사의 기준으로 보면 융통성과 효율 부족으로 여겨진다. 이는 조중균 세계의 기준과는 상관없이 조중균이 생산 활동을 하는 곳이 회사이므로 이곳 기준이 아예 배제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조중균에게 다시금 모욕적인 업무를 주는 것은 회사라는 공간과 여전히 부조리한 형태로 남아있는 직급체계가 어떠한 세계인지 잘 보여준다.

화자는 팩 안에 든 고기처럼 생각하지만 정작 본인이 팩 안에 든 고기처럼 보이는 걸 원하지 않는다. 사인해달라는 조중균에게 싫다고 단호히 거절하곤 본인은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절차랍시고 만든 본부장과는 다른, 그런 일들과는 무관한 사람이라고 딱 잘라 생각한다. 화자에게 사인은 본인이 팩 안에 든 고기임을 증명하는 일이자 화자와 조중균 모두에게 모욕과 수치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 틈에서 해란이 불쑥 일어나 다친 다리를 이끌고 조중균에게로 향한다. 화자 대신 ‘강해란’이라는 이름을 적어 넣는다. 해란의 사인은 공감이자 위로같이 느껴진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해란의 세계는 그런 곳이기에 “제가 할게요” 하고 외치는 대목은 독자를 울컥하게 만든다.
 
조중균이 확인 사인을 받아야 하는 것의 표면적인 형태는 모욕적인 시스템이지만, 이를 대하는 사람의 세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사인’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본부장이 구내식당에 오지 않는 날엔 식당 아줌마들이 “배고플 텐데 누룽지 끓인 거라도 좀 줄까?” 물으며 대신 사인해 주는 것과 본부장이 “사인하고 나 나가면 그때 밥 먹는 건 아니겠지?” 지적하며 사인하는 것이 다르듯이 말이다.

결국 조중균은 교정 기간을 한 달이나 넘겨 직무 유기, 태만이라는 명목으로 해고되고 해란은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고 회사를 떠난다. 화자 홀로 회사에 남아 회식 자리에서 상사 대신 고기를 굽고 그들이 주는 대로 술을 마시고 적당한 리액션과 웃음을 보탠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화자가 마치 악역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조중균과 해란을 멋대로 재며 따지고 마지막까지 회사에서 홀로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고등학생의 나도 화자를 악역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말 화자의 세계가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화자가 잘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더 좋은 태도와 판단을 보일 순 없었나 하는 아쉬움이 들긴 하지만, 화자도 본인만의 방식으로 자기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정규직 전환은 생계와 앞으로의 삶이 달린 중요한 문제이고, 그러므로 해란을 마냥 가까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터고 정규직 전환이 결정될 첫 실무가 조중균의 교정 작업으로 미루어졌으니 그간의 화자가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서도 회식 자리에서 상사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부장의 헛소리를 들으면서도 웃어야 한다.

 
무슨 힘, 사는 데 무슨 힘이 필요한가, 그냥 사는 거지, 생각하다가 주먹을 부장에게 보여주었다. “주먹이래요, 주먹.” (……) “뭐가 주먹이야?” “주먹구구 아니래요, 주먹이래요.”
 
「조중균의 세계」 중

 
하지만 뭐가 있었는가보다 뭐가 없었는가가 더 세세히 떠올랐다. 거기에는 육 인용 테이블이 없었다. 복수를 잊어버린 조중균씨도 없고 빈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조중균씨도 없었다. 나태한 조중균씨도 없고 내 사인이 적힌 수첩도 다행히, 아주 다행히 없었다. 문장과 시와 드라마는 있지만 이름은 없는 세계, 내가 간신히 기억하는 한, 그것이 바로 조중균씨의 세계였다.
 
「조중균의 세계」 중


화자는 여느 평범한 회사인 중 한 명이다. 이렇다 할 힘이나 의욕 없이 그냥 산다고 생각하며 주어진 일을 해내는 사회 구성원 중 하나. 그렇지만 해란이 주먹구구식으로 썰어서 만든 주먹고기 같다고 한 부장에게 해란 대신 해명 같은 반항을 해주고 조중균의 세계를 시는 있지만 이름이 없는 세계로 기억한다. 화자도 그들을 재고 따지지만은 않았음을, 자신의 세계에서 사라져버린 그들을 은근하게 그리워함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조중균의 세계」를 읽는 이들 중에는 조중균 같은 사람도, 해란 같은 사람도, 화자인 영주 같은 사람도, 혹은 이 셋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의 세계는 어떠한가. 조중균처럼 약하면서도 강한가, 해란처럼 유하면서도 당찬가, 영주처럼 평범하면서도 끝내 따스한가. 어느 세계에 살든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세상의 변화를 위해 끝까지 신념을 지키고, 모두가 부담스러워하는 역할에 다부지게 자기 이름 석 자를 적고, 떠나간 이들의 세계를 기억하며 취기를 빌려 상사에게 한마디 한다. 우리의 세계가 어떻든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살고 있다. 나의 세계와 더불어 ‘우리의 세계’에 살고 있다.
 
 
[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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