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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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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은 유년기로부터 비롯된다. 자라난 환경과 만난 사람들, 교육받으며 형성된 가치관과 성격, 최초의 기억과 공포·트라우마까지. 모두 평생을 끈질기게 따라붙는 삶의 그림자다. 이처럼 인생은 어린아이 때 모은 블록을 죽을 때까지 쌓으며 자신만의 장난감 성을 짓는 것과 같다.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슈퍼스타였던 퍼스트레이디이자 정치인, ‘에바 페론’ 또한 그랬다. 그는 유년 시절의 고통과 출신 콤플렉스라는 블록으로 가장 크고 화려한 성을 완성하곤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


에바 페론은 아버지에게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다. 1919년 아르헨티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처절하게 가난하고 결핍 많은 유년 시절을 견뎠다. 부친 장례식장에도 발을 들이지 못했던 그는 10대 중반에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한다.


타고난 미모와 불도저 같은 추진력, 카리스마를 가졌던 에바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남자들 여럿을 과감히 이용하며 어릴 적 꿈을 이룬다. 배우가 된 것이다. 그는 1944년 후안 페론을 만난다. 대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구호 기금을 마련하는 자리였다. 한눈에 후안이 보통 인물이 아닌 걸 직감한 에바는 정치적 이유로 구금된 그를 위한 석방 운동을 주도한다. 후안의 마음을 얻고 결혼에 성공한 그는 남편을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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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퍼스트레이디가 된 에바 페론의 신분 상승은 인생 역전이였다. 상류층은 에바를 천박한 연예인 출신이라며 무시했지만, 그는 후안을 구하고 자신의 삶을 구했다. 그는 유리구두를 신고 왕자를 기다리는 순종적인 신데렐라가 아닌, 전투화를 신고 투쟁하는 여전사였다.


후안은 ‘페론주의’를 바탕으로 노동자와 하층민을 위한 정책을 펼친다. 에바 또한 가난한 자들의 성녀로 떠오른다. 불행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지 않았던 에바는 빈민들의 손을 잡아주며 그들을 도왔고, ‘에바 패론 재단’까지 설립해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그럼에도 국민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당시 정책은 포퓰리즘(Populism : 대중을 동원해 권력을 획득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정치 시스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형태)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고, 아르헨티나 여성 참정권 도입에 크게 기여한 에바의 의도는 선했다. 하지만 그는 후안의 종신 통치 시도에 동조했으며, 비자금을 조성하고 재단 자금 축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치솟는 인기에 부통령 후보까지 된 에바는, 병마에 쓰러져 사퇴한 후 1952년 33세의 나이에 눈을 감는다.

 

 

뮤지컬 에비타_공연 사진_에바 페론 역 김소향, 후안 페론 역 윤형렬.jpg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곡을 쓰고 팀 라이스가 작사한 성스루 뮤지컬 <에비타>는 1978년 웨스트엔드에서 처음 공연됐다. 한국에서는 2006년 초연, 2011년 재연을 거쳐 14년 만에 2025년 11월 7일 서울 광림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에바 페론의 삶을 다룬 뮤지컬 <에비타>는 성녀도, 악녀도 아니었던 그를 다각도로 조명하며 화두를 던진다. 50년간 세계에서 공연된 작품은 동시대성이란 힘을 발휘하며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에바가 가졌던 욕망을 묘사한다.


라디오 DJ도 했던 배우 출신인 에바 페론은 연설에 능했다. 또한 자신 인생을 더욱 극적으로 서사화하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에바의 연설 능력과 사람을 끄는 힘은 후안 정치 인생에 큰 도움이 됐다. 뮤지컬의 ‘A new Argentina’, ‘Don’t cry for me Argentina’에 해당하는 장면이 대중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에바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작품은 그저 에바 일대기를 나열하거나 관객에게 그를 숭배하게 하려 만든 것이 아니기에, 제동 장치 또한 존재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 혁명 지도자이자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체 게바라’를 떠올리게 하는 ‘체’가 그렇다. 극에서 해설자이자 관찰자로 활약하는 체는 당시 아르헨티나 민중 또한 대변한다. 객석에서 등장해 극 내내 냉소적으로 에바를 바라보는 그는 때론 분노하고, 때론 비아냥대며 관객이 에바와 사랑에 빠지는 걸 막는다.


이는 한국에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뮤지컬 <엘리자벳>의 시니컬한 해설자이자 혁명가 ‘루케니’를 떠올리게 한다. <에비타>가 <엘리자벳>보다 수십 년은 더 앞선 작품이기에, 루케니는 체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캐릭터인 것이다. 체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 콤비의 또 다른 명작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유다’와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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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주인공(에바·지저스)에게 관조적인 시선을 보내며, 그와 대척점에 선 캐릭터들(체·유다)을 배치했다. 주인공을 ‘신’으로만 두는 걸 막는 서사와 음악은 결이 같다. 두 작품 모두 성스루(Sung-through : 대사 없이 노래로만 진행) 뮤지컬로, 넘버들은 한 곡 안에서도 변주가 여러 번 이뤄지며 감정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뮤지컬 <에비타>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 작품 중 가장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음악적 구성을 갖췄다. 정식 공연 전 발매된 음반은 100만 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며 음악적 가치를 먼저 증명했다. 후안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에바가 부르는 ‘Don’t cry for me Argentina’는 당대 최고의 디바만 부를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컬 넘버다.


<에비타> 한국 공연 세 번째 시즌은 2006년 초연 당시 배우로서 작품에 참여하기도 했던 홍승희가 연출한다. 에바 연설 장면에서 라이브캠을 활용하고, 공연 전후 무대에 자막을 띄우기도 하며, ‘Don’t cry for me Argentina’ 장면에선 에바가 연설하는 발코니가 객석에 가까워지는 무대 연출을 하며 관객에게 아르헨티나 민중 역할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출들은 체의 역할과 균형을 맞추며 에바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일 것이다.


12월 16일 오후 7시 30분 공연엔 김소향이 에바 페론 역할로 무대에 올랐다. 2006년, 후안 페론의 애인을 연기하고 노래했던 김소향은 20여 년이 지난 2025년엔 주인공 에바 페론으로 캐스팅됐다. <마리 앙투아네트>, <프리다>, <마리 퀴리>, <웃는 남자>, <모차르트!> 등 대극장과 중소극장, 주연과 조연을 쉼 없이 오가며 다작하는 그는 여러 작품을 통해 다양한 여성의 얼굴들을 보여주며 실력과 캐릭터 구현 능력을 완성해 왔다.


그가 연기하고 노래해 온 여성 인물들은 욕망과 호기심에 들끓고, 죽을 만큼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삶에 매달렸다. 결핍과 욕심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연약함과 강인함이라는 상반된 측면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캐릭터들은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생명력을 가졌다. 김소향의 에바 페론은 그가 연기해 온 모든 인물의 집약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장 뜨겁고, 인간적이며, 지능적이기도 했지만 연민할 수밖에 없었다. <에비타>의 김소향은 연기와 노래뿐 아니라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보여줬던 춤 실력 또한 다시 증명하며 무대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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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미모까지 갖춘 여자의 처지가 급변하는 걸 지켜보길 좋아한다. 이는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이다. 가장 고귀했던 여성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걸 관음하며 동정하거나, 낮은 곳에서 악착같이 살던 여성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걸 보며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전자는 <마리 앙투아네트>이며, 후자는 <에비타>다.


여왕·왕비·퍼스트레이디를 다룬 극은 많다. 대부분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작품이기에 극적인 구성이 가능하고, 관객 또한 이들을 잘 알아 감정 이입이 쉽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명성황후>, <잃어버린 얼굴 1895>, <엘리자벳> 등의 뮤지컬들은 새로운 시즌이 개막할 때마다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14년 만에 돌아온 <에비타>는 세계적인 인지도에 비해 한국에선 다소 낯선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완성도 높은 음악과 에바 페론의 삶을 극적으로 연출한 구성으로 지지받으며 공연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성녀, 반대로 아르헨티나 경제 몰락 원인이라는 상반된 평을 동시에 받는 에바 페론. 그의 시신은 세계를 떠돌았고, 여러 작품에선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이는 영원할 그의 스타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으로서 한 번뿐인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탐구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신이 에바 페론이라면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뮤지컬 <에비타>는 답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의 삶을 지켜보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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