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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가타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슈퍼베이비를 이긴 소년
신경계 질병 확률 60%, 우울증 확률 42%, 집중력 장애 확률 89%, 심장 질환 확률 99%, 조기 사망 가능, 예상 수명 30.2년. 빈센트 프리먼이 출생과 함께 받게 된 ‘감정서’의 내용이다. 빈센트의 유전자를 토대로 그가 얻게 될 질환의 가능성과 그의 예상 수명을 분석한 이 문서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열성인자’. 다시 말해, ‘2등 시민’이라는 뜻이다. 영화 <가타카>는 가까운 미래, 타고난 유전자의 우열이 사회적 계급을 결정하고 이에 따른 철저한 차별이 이루어지는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몸이 약한 빈센트를 키우며 현실과 직면한 그의 부모는 인공 수정을 통해 둘째를 갖기로 결정한다. 자연 임신으로 태어난 빈센트와는 달리 나쁜 인자가 제거된 완벽한 유전자를 가진 안톤은 무엇이든 빈센트보다 앞선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안톤과는 달리 심장 질환을 앓는 빈센트에게 우주 비행사라는 꿈은 묘연해 보인다. 그러나 늘 지기만 했던 수영 시합에서 처음으로 안톤을 이긴 어느 날, 빈센트는 생각보다 안톤이 강하지도, 자신이 약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운명’을 뒤흔든 순간이다.
실제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슈퍼베이비’ 열풍이 퍼지고 있다. 자녀의 유전적 리스크와 특성을 파악한 뒤 건강한 배아를 선택하는 스타트업이 기술업계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성장 중이라고 한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의 파트너가 해당 서비스를 이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더욱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기술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우생학을 낳을 우려가 있다는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정확도가 낮고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 또한 존재한다. 1997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오늘날의 현상을 예언하면서도 기술이 측정할 수 없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유전자 계급 사회
성인이 된 뒤 집을 나서 청소부 생활을 전전하던 빈센트는 우주 항공 회사 가타카에 청소부로 취직한 뒤 꿈과 현실의 격차를 더욱 실감한다. 결국 브로커에게 ‘우성인자 증명서’를 구매한 그는 우성인자를 가졌으나 하반신 마비로 은퇴한 수영 선수 제롬 모로우를 만난다. 그의 신체 조직 샘플을 통해 신분을 속이고 가타카의 엘리트 사원으로 취직한 빈센트는 토성의 위성 타이탄으로 가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된다. 그렇게 ‘부적격자’에서 ‘적격자’로 거듭난 빈센트는 가타카 경영자에게 촉망받는 인재로 성장하며 직장 동료 아이린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행운까지 누린다.
빈센트는 가타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매일 몸의 각질을 제거하고 제롬의 신체 조직을 일부러 흘리는 등 부단히 애를 쓴다. 그러나 타이탄으로의 출발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감독관이 살해당하고, 현장 근처에서 빈센트의 눈썹이 발견되면서 그의 사진이 가타카 곳곳에 걸리게 된다. 두려움에 휩싸인 빈센트가 꿈을 포기하려 하자 제롬이 막아서며 설득한다. ‘이제 사람들은 너를 볼 때 나만 본다’며. 실제로 가타카의 가장 우수한 인력이자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제롬 모로우가 된 빈센트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의 제목 ‘가타카(Gattaca)’는 DNA의 염기 서열을 이루는 A(아데닌), T(티민), G(구아닌), C(사이토신)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 오프닝 크레딧에 등장하는 제작진들의 이름에서도 A, T, G, C만 볼드체로 쓰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열성인자를 가진 부적격자는 범죄자가 되고, 우성인자를 가진 적격자는 엘리트가 되는 세상. 유전적으로 수치화된 계급을 기준으로 모든 질서와 규범이 정렬되는 <가타카>의 사회는 다양한 미장셴을 통해 시각화된다.
인물과 사물을 담은 프레임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대칭 구도와 기하학적으로 디자인된 건축물의 곧게 뻗은 직선, 반복되는 패턴은 고도로 정제된 사회 질서를 상징한다. 또한 블루, 그레이, 그린 등 차가운 색조의 컬러 팔레트와 저조도 조명은 미래지향적인 아우라를 자아내면서도 무균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강조한다. 단정한 수트와 비슷한 머리 모양을 한 직원들의 모습 역시 개성이 불순물처럼 제거된 통제 사회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는 로우 앵글의 반복과 가타카 사옥의 높은 에스컬레이터는 신분 상승의 불가능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제롬의 집에서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연상시키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며 가타카에 출근하는 빈센트의 모습은 그가 우성인자 증명서라는 ‘빌린 사다리’를 타고 사회에 진출했음을 보여준다.
승리의 비결
형사가 된 안톤이 감독관 살해 사건에 투입되면서 빈센트의 꿈은 위기를 맞는다. 제롬과 아이린의 도움으로 다행히 빈센트는 여러 검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다. 가타카의 경영자가 체포되면서 진범도 밝혀진다. 그럼에도 안톤은 빈센트가 사기죄를 저질렀다며 자수를 권한다. 갈등하던 둘은 결국 바다에 뛰어들어 다시 한번 수영 시합을 시작한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대사가 등장한다. 빈센트에게 뒤처진 안톤은 이렇게 묻는다.
안톤 : 형!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 모든 걸 어떻게 한 거야? 돌아가야 해.
빈센트 : 너무 늦었어. 반대쪽으로 가.
안톤 : 어느 쪽? 둘 다 죽길 원해?
빈센트 : 넌 알고 싶겠지. 난 되돌아갈 힘을 남겨 두지 않아서 널 이기는 거야.
바다와 우주는 모두 중력이 힘을 잃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수영과 비행은 중력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유전자의 우열을 기준으로 철저하게 계급화된 사회는 우주를 꿈꾸는 빈센트를 지구로 끌어 내리는 중력과도 같다. 날아오르지 않으면 추락할 일도 없다. 멀리 나아갈수록 돌아갈 길도 길어지고, 높이 날아오를수록 착지에 따르는 위험도 커진다. 하지만 빈센트는 자신을 가라앉고 추락하게 만드는 중력에 겁을 먹을지언정, 결코 여유를 남겨 두지 않는다. 있는 힘을 다해 앞만 보고 달려간 끝에 사회가 부여한 한계선을 넘어서고야 만다. 아니, 날아오르고야 만다.
심장 질환을 앓는 빈센트가 우주 비행사가 되기 위한 수많은 훈련과 시험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 열등한 유전자를 타고난 빈센트가 완벽한 유전자를 타고난 안톤을 두 번이나 이길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그가 빌린 우성인자 증명서로는 설명할 수 없다. 빈센트의 성공과 승리는 꿈을 향한 간절한 열망과 끈질긴 노력, 굳건한 의지가 쌓아 올린 기적의 결과인 것이다.
꿈을 향한 빈센트의 노력은 안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인다. 빈센트의 정체를 의심하던 아이린은 부적격자인 그가 꿈을 잃지 않도록 돕는다. 빈센트를 못 미더워하던 제롬은 가타카의 관문들을 통과한 그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아군이 마지막에 밝혀진다. 타이탄으로 향하는 우주선 앞에서 시행된 뜻밖의 불시 검문에 빈센트는 체념하듯 소변을 눈다. 검사 결과는 당연히 부적격이었지만, 검사관은 그를 통과시켜 준다. 그의 아들은 유전자 조작을 거쳤음에도 부적격자로 태어났는데, 빈센트처럼 가타카에 입사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즉, 검사관은 처음부터 빈센트의 정체를 눈치챘음에도 그의 꿈을 응원하는 마음에 그를 눈감아준 것이다.
엇갈린 운명
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만한 또 다른 지점은 빈센트와 제롬의 관계성이다. 빈센트가 가타카에 취직하기 전, 제롬은 빈센트에게 자신의 은메달을 보여주며 “난 아직도 2위야.”라고 말한다. 이는 안톤과의 수영 시합에서 늘 2위를 차지했던 빈센트의 과거를 연상시킨다. 물론 우성인자를 가진 제롬의 은메달이 영광의 증거라면, 빈센트의 패배는 열성인자를 가진 2등 시민의 당연한 결말이다.
하지만 은메달리스트였던 제롬을 불구로 만든 교통사고는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난 자살도 못해.”라는 제롬의 말에는 그의 정신에 오랜 시간 뿌리내린 우울이 묻어난다. 반면 빈센트는 ‘신경계 질병 확률 60%’라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한계를 딛고 불가능해 보였던 꿈에 점차 다가선다.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러닝머신 위를 달리다가 탈의실에 돌아와 숨을 헐떡이며 쓰러지는 빈센트의 모습에서 그의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력을 엿볼 수 있다.
빈센트 대신 집에서 검문을 받게 된 제롬이 안톤을 맞이하기 위해 계단을 힘겹게 기어오르는 장면은 여러모로 인상 깊다. 가타카에 출근하는 빈센트의 모습을 통해 유전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계급 사회를 은유했던 나선형 계단은 여기에서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빈센트가 타이탄으로 출발하는 날, 제롬이 말한다. “난 몸만 빌려줬지만, 넌 내게 꿈을 빌려줬어.” 이는 은퇴 후 목표를 잃은 채 살아가던 제롬이 빈센트를 만나 그와 함께 꿈을 꾸게 되었음을 뜻한다. 오직 상반신만의 힘으로 기나긴 계단을 전부 오른 제롬은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초월하여 자신과의 시합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빈센트의 꿈과 제롬의 꿈은 결국 안타까운 엇갈림으로 이어진다. 빈센트가 평생 쓰고도 남을 분량의 신체 샘플을 남긴 제롬은 앞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빈센트가 타이탄으로 향하는 우주선에 탑승하는 장면과 제롬이 소각로에 들어가는 장면은 교차 편집되어 제시된다. 은메달을 목에 건 제롬이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빈센트가 탄 우주선이 발사된다. 빈센트가 우주선에서 펼쳐 든 제롬의 편지에는 제롬의 머리카락 뭉치와 함께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행복할 수 없는 곳이지만 떠나기 싫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몸속의 모든 원소도 우주의 일부라고들 한다. 어쩌면 난 떠나는 게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제롬의 담담한 내레이션과 함께 눈에 물기가 어린 빈센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눈동자를 닮은 동그란 창문 밖으로 별들이 반짝이는 우주의 풍경이 펼쳐지는 엔딩은 슬픈 여운을 남긴다. 그의 자살은 사실 일찍이 예고되었다. 빈센트와 제롬이 파티에서 함께 술을 마실 때, 자신이 떠나면 뭘 할 거냐는 빈센트의 질문에 제롬은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들이키며 “난 이걸 끝낼 거야.”라고 답한다. 무엇이 그가 스스로의 삶을 끝내게 했을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일까, 돈을 내지 않으면 찾아올 친구가 없는 외로움일까. 과연 그가 꿈을 이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빈센트가 그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을 남긴 것만은 확실하다.
불가능이란 없다?
아름답고 잘 짜인 미장셴과 강렬한 메시지가 돋보이는 수작이라는 인상이다. 다만 나는 이 영화의 주제 의식에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하겠다. 간절히 꿈꾼다고 해서 모든 걸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빈센트가 말했듯, ‘운명을 결정할 인자는 없다.’ 하지만 유전자와 더불어 무언가를 선택할 능력이 없는 생애 초기의 짧은 경험이 인간의 운명을 상당 부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가타카>가 강조하는 인간의 ‘의지’는 행동을 결정하고 통제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전두엽을 통해 발휘된다. 게으름이나 성실함과 같은 성품 또한 유전의 영향을 받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노력도 재능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정론자가 되거나 지나치게 낙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뇌에는 신경 가소성이 있다. 이는 뇌가 학습과 경험을 통해 신경회로를 다시 조직하여 변형을 일으키는 현상으로, 인간의 평생에 걸쳐 지속된다. 즉, 우리에게 변화할 기회는 언제든지 주어져 있다. 인간의 기술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예측하지만, 모든 것을 장담할 수는 없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려면 일단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만화 <슬램덩크>의 대사처럼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니까.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된 빈센트의 우주 비행은, 불가능이 가능으로 뒤바뀌는 기적이 희망을 잃지 않는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