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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브로드웨이를 점령한 고양이와 유령, 그리고 '메가'의 시대 [문화 전반]

영국산 스펙터클은 어떻게 세계의 무대 언어가 되었나

by 장수정 에디터
2025.12.18 12:33

 

 

뮤지컬의 역사를 논할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미국의 브로드웨이를 중심에 둔다. 하지만 현대 뮤지컬 산업의 지형도를 바꾼 거대한 지각변동의 진원지는 사실 런던의 웨스트엔드였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줄리 앤드류스의 미국 진출작인 <보이프렌드>(1953) 정도가 명맥을 잇던 영국 뮤지컬은, 1980년대에 들어서며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을 일으킨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카메론 매킨토시. 이 두 거장이 쏘아 올린 '메가 뮤지컬(Mega Musical)'은 무대가 커진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뮤지컬이 '수공예품'에서 '글로벌 프랜차이즈 상품'으로 진화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거대한 스펙터클, 언어를 넘어서는 '성스루'의 마법


 

메가 뮤지컬을 규정하는 첫 번째 요소는 압도적인 스펙터클이다. <캣츠>의 거대 타이어, <오페라의 유령>의 샹들리에, <미스 사이공>의 헬리콥터, 그리고 <레미제라블>의 바리케이드. 이 장치들은 작품의 시그니처가 되어 거대한 홍보 효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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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더해진 핵심 무기는 바로 '성스루(Sung-through)' 형식이다. 대사가 플롯을 이끌던 기존 북 뮤지컬(Book Musical)과 달리, <레미제라블>이나 <캣츠>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만 진행된다. 이는 언어의 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결과를 낳았다. 팝, 록, 오페라가 혼합된 웅장한 음악은 번역의 한계를 넘어 전 세계 관객에게 직관적인 감동을 전달했고, 이는 뮤지컬이 영미권을 넘어 글로벌 장르로 확장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다.

 

 


뮤지컬, 산업이 되다: 레플리카와 라이선스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는 뮤지컬에 '산업'의 옷을 입혔다. 그는 뮤지컬을 전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 퀄리티로 즐길 수 있는 '표준화된 상품'으로 만들고자 했다. 여기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레플리카(Replica)'다.


레플리카는 음악과 대본은 물론, 무대, 의상, 조명, 심지어 배우의 동선까지 오리지널 프로덕션을 그대로 '복제'하듯 가져오는 방식이다. 정말 까다롭게는 배우의 발끝, 손끝 하나하나 오리지널 공연과 똑같이 무대에 올려야 한다. 우리가 한국에서 보는 <오페라의 유령>이나 <레미제라블>이 런던이나 뉴욕의 공연과 같은 감동을 주는 이유기도 하다. 반면, '논 레플리카(Non-replica)' 혹은 일반 라이선스 방식은 현지 정서에 맞게 연출과 무대를 재창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이는 한국의 <지킬 앤 하이드>나 <레베카>가 원작에서 더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며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매킨토시는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뮤지컬을 영화의 ‘멀티플렉스’처럼 전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상영되는 비즈니스 모델로 구축했다. <캣츠>의 고양이 눈, <오페라의 유령>의 하얀 가면 로고 하나만으로도 티켓을 팔 수 있는 브랜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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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점은 이 거대한 흐름이 처음부터 환영받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캣츠>와 <오페라의 유령> 초연 당시, 평론가들은 "스펙터클이 예술을 잠식했다", "뮤지컬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라며 혹평을 쏟아냈다.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보편적인 구원과 사랑, 삶과 죽음이라는 거창한 플롯(Grand Plot)과 화려한 볼거리에 매혹되었다. 평론가의 차가운 이성보다 관객의 뜨거운 감성이 메가 뮤지컬의 생명력을 증명해낸 셈이다. 이는 대중예술로서 뮤지컬이 가져야 할 미덕이 무엇인지 시사한다.


 

 

한국 뮤지컬, 메가 뮤지컬의 유산을 넘어


 

한국은 메가 뮤지컬의 영향을 가장 뜨겁게 받은 시장 중 하나다. <명성황후>와 <영웅>을 제작한 에이콤은 1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역사(Monumental History)를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 한국형 메가 뮤지컬의 기틀을 닦았다. 최근에는 EMK 뮤지컬 컴퍼니가 <웃는 남자>, <마타하리> 등을 통해 유럽풍 메가 뮤지컬의 문법을 한국적으로 체화하여 역수출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최근 주목할 만한 흐름은 오디컴퍼니의 <일 테노레>와 같은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오페라를 꿈꾸었던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영웅적인 서사 대신 '작고 완벽한 세상'을 꿈꾸던 앙상블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보통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앙상블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노래할 때, 메가 뮤지컬의 스펙터클과는 또 다른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전통적인 브로드웨이 문법에는 ‘11시 곡(11 o'clock number)’이라는 개념이 있다. 공연이 끝날 무렵(밤 11시경), 주인공이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며 주제를 관통하는 넘버를 부르는 공식이다. 하지만 최근의 뮤지컬들은 이러한 공식을 비틀거나, <일 테노레>처럼 소시민들의 합창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1980년대 웨스트엔드에서 시작된 메가 뮤지컬의 파도는 이제 한국에 닿아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충격으로 시작된 우리의 뮤지컬 사랑은, 이제 화려함 뒤에 가려진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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