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5년 12월 22일 크리스마스 거리의 풍경, 정부기록사진집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니, 자연스럽게 캐롤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 캐롤을 듣자니 문득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크리스마스 ···. 길거리를 채우는 캐롤, 백화점 앞을 장식한 거대한 트리, 케이크의 촛불을 불며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는 사람들.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연말을 상징하는 가장 따뜻하고 보편적인 풍경이다.
그런데 잠깐. 우리는 언제부터 이토록 성대하게 (정확한 날짜도 아닌) 예수의 생일을 축하했을까? 일요일 아침이면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고, 군대에 가면 십자가가 세워진 교회를 만나는 것.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이 풍경들은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과 70여 년 전, 격동의 시대 속에서 치밀하게 '디자인'된 의례다.
모든 것이 혼돈이던 1948년,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던 그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모든 국가의 시작에는 상징이 필요하다. 1948년 5월 31일, 나라의 뼈대를 세우는 제헌 국회의 첫 개원식. 공식적인 첫 번째 의사일정은 놀랍게도 '기도'였다.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단상에 올라 의원 전원을 기립시킨 뒤, 이윤영 목사에게 개회 기도를 부탁했다. 그리고 이후 낭독된 선서문과 개회사에서도 기독교적 언어가 뚜렷이 드러난다.
본 의원은 조국 재건과 자주독립을 완수하기 위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정부를 수립하며 남북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여 국가 만년의 기초를 확정하고 국리민복을 도모하여 국제친선과 세계평화에 최대의 충성과 노력을 다할 것을 이에 하나님과 순국선열과 3천만 동포에 삼가 선서함.
우리가 오늘 우리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이 있게 된데 대하여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째 애국선열들의 희생적 혈전한 공적과 셋째로는 우리 우방들 특히 미국과 국연의 공의상 원조를 깊이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서울신문』, 1948.06.01, 『조선일보』, 1948.06.01
이러한 발언에서 사용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모든 이에게 같은 방식으로 수용되었을지는 분명치 않지만, 공적 의례와 기독교 언어가 결합된 장면은 이승만이 국가의 이념적 정당성을 종교적 언어를 통해 구축하고자 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기서 흥미로운 모순이 발생한다. 바로 그들이 만든 헌법 제12조는 "모든 국민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고 선언했다. 이론상, 국가는 그 어떤 종교에도 특혜를 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1948년 5월 9일(일요일)로 예정되었던 제헌의원 선거가 "주일(일요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기독교계의 항의로 하루 연기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승만 정권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과 모순되게, 기독교를 국가 제도의 핵심 축으로 삼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들은 기독교의 반공주의적 윤리와 도덕성을 정권의 이념적 방패로 삼고자 했고, 교회는 국가라는 강력한 울타리 안에서 영향력을 확장할 기회를 얻었다. 이 '완벽한 파트너십'은 국가의 가장 강력한 제도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대상이 된 것은 군대였다. 1950년, 전쟁의 화염 속에서 군인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을 강력한 '정신적 무기'가 필요했다. 국가는 반공과 결합된 기독교 신앙을 선택했다. 1951년, 목사들은 현역 장교의 계급장을 달고 군대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다. 군종제도는 "대공(對共) 심리전과 사상전"의 핵심 도구로 작동했다. 국가 권력은 '반공'이라는 이념적 갑옷을 얻었고, 교회는 '군대'라는 거대한 선교지를 얻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탄생한 군종제도는, 신생 국가가 종교 의례를 국가 시스템에 편입시킨 가장 선명하고 강력한 첫 번째 사례였다.
이러한 국가와 종교의 파트너십은 전쟁터에서 가장 어둡고 고립된 공간, 바로 '형무소'로 그 영역을 확장했다. 형무소는 전통적으로 국가 권력이 인간의 영혼을 통제하고 교정하는 도덕적 공간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 거대한 실험실에 기독교를 '교정 이데올로기'로 주입하고자 했다. 1952년, 형목(刑牧)제도가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다. 이는 단순한 위로나 상담의 차원이 아니었다. 형목들은 교도소에 상주하는 정식 공무원이었다. 심지어 부소장급에 해당하는 교무과장이라는 핵심 보직을 받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이 자리는 철저히 개신교 목사들로만 채워졌다.
이들의 임무는 명확했다. 재소자들에게 '반공 시민'으로의 재사회화를 유도하는 것. 형무소라는 특수 공간에서 '기독교 감화'와 '반공 교육'은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결합되었다. 1949년 한 신문은 당시 정원의 40~50%를 초과한, 유사 이래 최대의 기록으로 붐비던 형무소의 풍경을 전한다. "어느 형무소에서나 지금 일주일에 한 번씩 강당에 죄수를 모아 놓고 전임 목사가 성서의 구절을 인용하여 가며 인간 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이것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보도했다.
성과는 놀라웠다. 왜였을까? 물론 죄수를 만나면 예수를 믿으라는 전도의 열성도 있었겠지만, 형목들은 신의 구원 외에 아주 현실적인 권한을 쥐고 있었다. 형기 3분의 1 이상이 지난 재소자의 가출옥(가석방)을 상신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형목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구원의 복음은 현실의 석방과 직결되었다. 이 아이러니한 구조 속에서 형무소 선교의 효과는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형목제도는 개신교에 의한 특혜적 독점이라는 이유로 폐지되었지만, 이는 국가의 이념이 종교의 언어를 빌려 개인의 삶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압축적인 사례로 남았다.
군대와 형무소라는 '공간'이 제도화되었다면, 이제 '시간'을 구조화할 차례였다.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의 시간 질서를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일상 리듬 속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성탄절(12월 25일)은 1945년 미군정에 의해 처음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49년 5월, 대한민국 정부는 이 기독교의 축일을 삼일절, 헌법공포 기념일, 광복절, 개천절 등 국가의 가장 중요한 국경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식 공휴일로 재확인했다.
정부는 이 '새로운 명절'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1949년 첫 크리스마스, 정부는 24일과 25일 양일간 귀하디 귀한 전기를 서울 전역에 밤새도록 공급했고, 음식점의 음악 금지 조치도 특별히 해제했다. 대통령은 해마다 성탄 메시지를 발표했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이날은 모두가 축하해야 하는 날"이라고 선포했다.
이러한 선택의 의미는, 버려진 것과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당시 국가의 또 다른 뿌리였던 '개천절'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본래 11월 3일이었던 것을 10월 3일로 바꾸는 등 혼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은 단 한 차례도 개천절 공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는 1949년 개천절 경축사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승만은 단군을 '신인(神人)'이 아닌 '위대한 인간 지도자'로 규정하며, 단군 신화 자체를 "상고의 암매한 시대에 공상한 소리", 즉 미신이라고 일축했다.
민족의 건국 신화는 미신적 전설로 격하되었고, 예수의 탄생은 현대적 국가 의례로 격상되었다. 개천절이 과거의 전통에 머물렀다면, 성탄절은 반공, 도덕, 윤리라는 당시 정권이 추구하던 현대적 이념을 상징하는 강력한 아이콘이었다.

서울역 앞에 설치한 크리스마스 기념장식과 서울역 야경, 1959.12.24., 정부기록사진집
군인의 막사에서, 죄수의 감방에서, 그리고 마침내 국민 모두의 달력 속에서 이승만 정권 초기의 기독교 의례 제도화는 단순한 종교 우대를 넘어, 정치권력과 종교 권위가 서로를 정당화하며 얽혀 들어간 정교한 '구조'의 탄생이었다. 국가는 도덕적 언어를 얻었고, 종교는 제도적 공간을 얻었다. 이 견고한 결합은 이후 한국 사회의 풍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이 그린 풍경 속을 무심코 거닐고 있다. 이제, 그 익숙한 풍경의 설계도를 다시 펼쳐볼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