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명하는 예술, 조망하는 예술
종교가 누렸던 권위는 새로운 종교인 ‘의학’과 ‘자본’의 차지가 되었다. 데이미언 허스트는 의학에 대한 맹신과 자본주의 세계로의 투신을 ‘조망’한다.
예술가는 어떤 현상을 조명할 수도 있고, 조망할 수도 있는데 그는 조망한다.
조명(照明)은 '비추어 밝힌다'는 뜻이다. 감추어져 있던 것, 잊혀진 것, 어둠 속에 있던 것을 향해 빛을 보내는 것이 조명이다. 이렇게 빛을 비추는 행위에는 어둠을 걷어내겠다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는 ‘감정’에 기인한다. 어둠 속 존재들에 대한 연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책임감, 구태여 들여다보려는 다정함.
그런데 조망(眺望)한다는 것은 "높은 곳에서 먼 곳이나 넓은 공간을 멀리 바라본다는 것"이다. 즉, 조망은 대상과의 격리를 전제로 한 우월한 응시다. 허스트는 ‘조망’하는 예술가다.
부패한 소의 머리 위로 파리가 들끓고, 포름알데히드에 잠긴 상어는 영원히 썩지 않는 죽음을 전시당하고, 수천 마리의 나비는 캔버스 위에서 날개를 펼친 채 굳어 있다. 이것들은 전부 한때 살아 있었던 존재들이다.
그런데 허스트는 이 존재들을 단지 재료로 사용하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한다. 상어는 "수조에 넣어 관람객들의 반응을 유발하는 오브제"가 되고, 죽은 소는 “은유적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명제 그 자체”가 되며, 나비는 "특정 색상 배열에 따라 캔버스에 붙여서 시각 효과를 내는 소재"가 된다. 거기에 인간적인 연민이나 책임감, 다정함은 끼어들 틈이 없다.
존재와 나의 거리를 인식하는 객관화를 넘어서, 죽음을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정당하다면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쓰여도 된다는 도구화.
2. 웃기는 일이다.
심지어 허스트는 관객과도 거리를 두고, 관객마저 도구로 전락하게 만든다.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본 작품은 허스트의 것이 아니었다. 입구에서부터 건물을 휘감듯 늘어선 줄, 그 줄 자체가 첫 번째 작품이었다. 죽음을 다룬 전시에 이토록 생기 넘치는 인파라니. 30분쯤 줄을 서서 겨우 들어간 전시장 안은 더했다. 작품 앞에는 이미 서너 겹의 사람이 겹겹이 서 있었고, 어떤 작품은 사람 머리 사이로 조각조각 보일 뿐이었다. 한가하게 감상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죽은 소의 머리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파리가 들끓는 부패한 머리를 보면서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었고, 누군가는 같이 온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웃었고, 누군가는 작품 설명을 소리 내어 읽다가 다음 작품으로 옮겨갔다.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구경하러 왔으니까 구경하고 가는 것이겠지만, 그 능숙한 구경이 오히려 섬뜩했다.
그러나 그 틈바구니에서 나라고 달랐을까. 해골 옆에 서서 환히 웃는 표정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 전시장을 나오려던 찰나, 허스트는 이 장면까지 예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람들이 이토록 기괴하고 참혹한 장면들을 구경하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서고, 돈을 내고, 사진을 찍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나는 왜 여기에 와있지? 나는 무엇을 보고 싶었지?
단순하다. 비싸고 유명한 작품을 소비하는 자기 자신의 남다른 취향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문화 경험이 취향이 되고, 취향이 정체성이 되는 시대에 '데이미언 허스트를 봤다'는 것은 꽤 쓸만한 정체성의 재료가 된다. 언젠가 다 죽어 없어질 존재라는 겸허함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정체성에 대한 갈망과 집착이 사람들을 전시장으로 이끄는 것이다.
웃기는 일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마주하는 겸허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죽음으로 소멸할 존재들이 죽음이라는 테마를 빌려, 더 맹렬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더 화려하게 자신을 전시하려는 정념만이 가득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 앞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소유욕과 과시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렇다. 허스트는 표면적인 메시지와 진짜 메시지를 분리한다. 표면에는 '죽음에 대한 직면', '의학에 대한 맹신', '자본에 대한 투신'이라는 그럴듯한 주제를 내걸어 놓는다. 그런데 진짜 메시지는 그 뒤에 있다. 허스트가 정말로 보여주는 건 죽음이 아니라, 죽음조차 소비하는 인간의 정념이다. 죽음을 마주하게 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고 믿게 하면서 실은 구경꾼들의 소유욕과 과시욕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쇼윈도가 된다. 관객은 "나는 죽음을 직시할 줄 아는 용기가 있는 사람, 문화예술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입장하지만, 사실은 그 생각 자체도 허스트가 설계한 소비 행위의 일부에 불과하다.
역겨워졌다. 그는 구경꾼들을 자기 작품의 또 다른 오브제로 만든다. 죽은 소에서 배어 나온 검은 피를 찍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발 디딜 틈도 없었던 그 전시장의 광경. 그것이 허스트가 진짜 보여주고 싶었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그래 죽음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그 전시의 백미였다.
3.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여기까지 말하면 내가 너무 배배 꼬여 있는 걸까. 그런데 나는 그 전시장에서 정말로 그렇게 느꼈다. 전시 전체가 고도의 사회실험 같았다.
그래서 데이미언 허스트 전시에 몰린 그 수많은 인파들과 나는 섞일 생각 없이, 가만히 분리되고 싶었다. 그런데 분리되고 싶다는 그 마음과 다른 관람객들을 관찰하는 내 시선이, 허스트의 우월한, 차가운 응시와 닮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다시 역겨워졌다.
허스트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전시의 제목이 떠올랐다.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그렇다. 이 전시에 진실은 없었다. 죽음도, 겸허함도, 예술적 감동도 진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했다. 죽음을 소비하는 것도, 소비하면서 감동받았다고 믿는 것도, 그 믿음조차 설계된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도.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분리되고 싶다고 느끼면서, 결국 분리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