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동예술극장에서 진행한 2025년 ‘제8회 중국희곡 낭독 공연’에서 선보여진 <광인일기>가 마침내 온전한 연극으로 돌아왔다. 루쉰의 동명소설을 극작가 좡자원이 각색하고, 중국연극 전문가 장희재가 번역한 연극 <광인일기>는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놀이클럽의 미학과 만나 새로운 공연을 펼친다.
광인 혹은 식인의 사이에서

‘나’는 옆집 개와 동네 사람들, 그들의 아이들 심지어 자기 가족마저도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수군대는 것을 느낀다. 옆의 늑대마을에서 죽은 사람의 심장과 살점을 먹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달려든다. ‘나’는 동네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여 자기 몸을 뜯어먹는 것으로 생각한다. 친형 역시 식인의 예외는 아니어서 자신을 집안의 작은 방에 가두었다. 이 마을에는 두 종류의 인간만-인간을 먹는 인간과, 인간을 먹지 않겠다는 미친 인간-이 있다.
연극 <광인일기>에서 식인은 우스꽝스럽게 예찬된다. 화려한 옷을 입은 마을 사람들은 줄지어 역사서에 남아 있는 식인의 기록과 그 효과를 증언한다. 이 식인 예찬에 진지함은 없다. 배우들은 성대모사, 각종 유행하는 밈을 활용하여 식인을 가볍게 표현한다. 식인에 대하여 한 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 마이크를 서로에게 빼앗는 사람들 뒤로, 붉은색으로 천에 적힌 ‘인의도덕’이 내려앉는다. 인의도덕에 식인이 있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개와 인간의 역사

연극 <광인일기>가 원작 소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개라는 캐릭터에 있다. 원작 소설에서 잠시 등장하던 구 씨 영감의 개는 연극 <광인일기>에서는 인간 역사와 세계를 관망하고 비소 짓는 관찰자로 재탄생했다. 연극 시작 전 개 역할을 맡은 배우는 관객들에게 비상시 대피요령을 알려준 뒤, ‘광인일기’를 낭독한다. 사람의 말과 행동을 하는 개 옆으로 개처럼 짖는 ‘나’가 등장한다. 단어의 반복 속 사람처럼 서 있던 개는 개가 되고, ‘나’는 인간이 된다. 이것은 ‘나’가 아직 광인인 시절이다. 연극의 결말 ‘나’가 광인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했을 때 인간과 개의 관계는 다시 역전된다. 인간은 개가 되고, 개는 인간이 된다. 관객이 처음 봤던 장면은 곧 이 연극의 결말인 셈이다.
‘나’는 개의 말을 알아듣는다. 개는 다른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재롱을 부리는 개이나, ‘나’ 앞에서만은 인간의 오천 년 역사를 관통하는 초월자가 된다. 개는 사람 먹기를 이상하게 여기는 ‘나’를 가소롭게 바라본다. 나약한 것들이나 자기 스스로 분신하고 손목을 긋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가 보기에 인간인 ‘나’의 광기는 인류 역사에서 종종 발생하는 이변일 뿐이다. 어차피 식인의 세계에 살고, 그러므로 너도 다를 바 없지 않느냐고 눈빛으로 말한다.
연극 <광인일기>에서 또한 주목할 것은 시간성이다. 루쉰의 ‘광인일기’가 1918년 출판되어, 당시 중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면 연극 <광인일기>는 원작의 시간성을 21세기 한국까지 확장한다. 연극 <광인일기>에서 배우들은 소설 ‘광인일기’를 낭독할 때 책이 아닌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이용한다. 갇힌 방에 하루 두 번 식사를 가져다주는 이(천라오우)는 배달 노동자로 바뀌었다. 연극에서 나는 길거리 노파, 해고된 노동자, 극우 정치인, 그리고 조깅하는 여성에게 사람을 먹는 것이 옳은 일인지 질문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답변을 하지만 모두 식인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노파는 그렇게 식인이 싫으면 종아리 살이라도 내어달라고 말한다. 해고된 노동자는 직장을 잃고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세상 이치를 모른다 비난하자 자기 딸을 잡아먹었다. 그런 뒤 ‘나’에게 자신을 먹어달라 부탁한다. 극우 정치인은 식인으로 만들 부강한 나라를 설파하고, 조깅하던 여성은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 말한다.
소설 ‘광인일기’에서 ‘나’는 세상 사람들을 이렇게 구분한다. “모두들 사람을 먹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생각이 같지 않음을 나는 안다. 옛날부터 그랬으니까 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패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먹고 싶어 하는 패의 두 종류다.”
사람을 먹는 게 옳은 일이오?

루쉰의 ‘광인일기’의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다. “사람을 먹어보지 않은 아이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구해야지...” 그러나 동시에 소설의 첫 문단은 “책명은 본인이 완쾌된 후에 붙인 것이기에 다시 고치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어, ‘나’가 광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광인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병적인 피해망상에서 벗어났다는 것, 즉 식인을 인정하고 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람을 먹지 않으려 격렬하게 저항하고 식인하는 사람들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느꼈던 ‘나’ 마저 식인을 함으로써 광인에서 식인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인간은 다시 개처럼 짓고 개는 다시 인간처럼 말한다.
연극과 소설에서 식인은 단순히 사람을 먹는 행위가 아니다. 식인은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 그 자체다. 먹지 않으면 먹힐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행위는 오천 년 인간 역사에서 계속 반복됐다고 연극은 해설한다. 시절이 어려울 때 배가 고파 사람을 먹었던 인간들은 이제 하나의 유흥과 즐거움으로 식인을 행한다. 시절의 어려움과 순탄함은 식인과 관련이 없는 셈이다. 식인이 당연한 사회에서 식인을 거부하는 것은 미치광이가 되겠다는 선언과 같다. 미치광이 되기는 괴로운 일이다. 동네의 아이들까지 자신을 음흉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며, 바뀌지 않을 세상이 이미 바뀐 것처럼 믿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광인이 노력의 상태라면, 식인은 노력하지 않아도 당도할 수 있는 상태다.
연극 <광인일기>에서 자신이 여동생을 먹어 살아남았음이 밝혀졌을 때, ‘나’는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자신은 여동생을 먹고, 부모는 형을 먹었다는 사실. 자신도 이 식인하는 세계 바깥에서 살고 있지 않았음을, 살아남았다는 것은 자신이 먹히지 않고 먹었다는 증거임을 깨닫고 ‘나’는 절망한다. 차라리 나를 먹으라며 세상에 소리친다. 천장 높이 달려 있던 조명과 관객석보다 높은 곳에 있던 무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땅바닥으로 하염없이 하강한다. 천장과 바닥은 거의 맞닿을 수준이 되어,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어진다. 마침내 ‘나’는 식인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광인에서 벗어난다.
그렇다면 내내 먹고 먹히지 말자고 울부짖은 ‘나’의 절규는 허황된 말일 뿐인가. 우리는 구조 속에서 살고 동시에 구조를 주조한다. 온전한 자유도 온전한 종속도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다. 우리에게는 주체성이 있지만 동시에 주체성은 한계를 갖는다. 구조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꼼짝달싹할 수 없다는 말도 거짓이다. 연극<광인일기>에서 형은 사람 고기를 한 입이라도 먹은 자는 아주 많이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한 번 맛을 보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 고기를 한 번도 먹지 않은 아이들을 찾는다. 그러나 막 태어난 아기조차 사람 고기 먹은 자들이 낳았기에, 이 식인의 세계와 분리되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연극 <광인일기>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팔레스타인 학살, 이란 전쟁을 언급한다. 오늘도 인간은 인간을 먹고 있다. 우리는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되는 대로 서로를 잡아먹는다. 누군가는 그것에 반대하나, 그조차 식인을 인정하는 방식이곤 하다. 광인일기에는 희망이 없다. 식인에 반대하던 광인조차 어떠한 유의미한 만들지 못한 채 식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변화가 없더라도 식인하기를 옹호하는 것과 광인이 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우리가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야만이 우리 삶을 이루지 않기를, 최선을 다해 몸부림치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놓을지 누구도 확언할 수 없을지라도. 백 년 전 광인의 일기가 오늘의 무대에서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면, 그것이 연극 <광인일기>가 우리에게 찾아온 까닭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