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쌍해?'
극의 초반부에서 이런 대화가 나온다. 나 이 에코백 사려고. 내가 사 줄게. 왜? 내가 불쌍해서?
이 대화는 단순히 극의 초반부를 위해 흘러지나가는 대화였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깊이 꽂힌 말이었다. '내가 해 줄게', 혹은 '내가 사 줄게' 라는 선의를 들었을 때 보통 돌아오는 답은 '고맙다'라는 의사표시지만, 극에서는 이러한 선의에 대하여 냉담하게 받아친다. 그렇다고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상대방의 선의가 나를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하여 꿰뚫는다. 왜 나에게 주었을까. 내가 불쌍해 보여서?
연민이 싫다. 할머니가 되면 허리도 굽어지고 힘도 없어져 마치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안쓰러운 시선들이 싫다. 욕망은 옅어지고 살고자 하는 의지만 가지고 있겠거니 바라보는 태도가 싫다. 암묵적으로 '소녀, 숙녀, 아줌마, 할머니'를 대할 때 달라지는 행동들이 싫다. 결국에 마주한 시간만 다를 뿐인 '나'인데 말이다.
우리 모두는 '할머니'라는 존재에 연민을 품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혼자서 외로워 보인다던가, 편찮으셔서 불쌍해 보인다던가 말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눈높이대로 할머니의 상황을 재단한 것 뿐이다. 어쩌면 할머니는 욕망도 가득하고, 했던 것도, 하고 싶은 것들도 많고, 세상이라는 콘크리트 위에서 춤추고 싶었을 지도 모르는데.
2025년의 여자들
1막은 2025년을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유림, 은희, 화정, 대진, 미영, 순미 여섯 여자들은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어떤 여성은 학교에 있을 동안 혼자 있게 될 할머니의 처지를 통해 처음 슬픔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여성은 조식 뷔페를 간다는 일념으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가지각색의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 중 인상깊던 이야기가 있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인 유림의 이야기였다. 유림은 죽고 싶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엄마 카드를 쓰며 놀기도,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지만 죽고 싶다고 소리칠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아는 언니와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 유림은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말한다. 언니는 위험하니 같이 가자고 다독였지만 괜찮다며 언니를 앉히고 혼자 나간다. 담배를 피우고 아파트로 들어가려 보니 언니는 나와서 유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림은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살짝 웃으며 말한다. '언니는 내가 죽으려는 줄 알았나 보다'.
난 그때 어쩌면 그 순간이 이 여자가 살아볼까? 라고 다짐한 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후에도 여전히 종종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럼에도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결심 말이다.
중학생이던 시절 방학이었던가, 어렸지만 예민하던 나는 혼자 있을 때 자주 불안해했다. 불안이 심하던 시절에 엄마가 나를 위해 회사를 조퇴하고 함께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 날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인생 처음 루꼴라 피자를 먹으면서 야채가 너무 많이 떨어져 남자친구와는 오기 힘들겠다고 웃었다. 쓰지도 않는 문구류를 구경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웃었다. 엄마에게는 지나가는 날들 중 하나였을지 모르겠지만 이 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날 중 하나가 되었고, 어린 내가 꿋꿋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던 날이 되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 순간들에 우리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기도, 안정되고 편안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2025년의 여자들은 살아간다. 무엇이 순탄한 길이고 무엇이 비탈길인지 모른채 살겠다는 의지 하나로 그 길을 걸어간다.
2058년의 여자들
2025년에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만났던 여자들은 생활동반자법과 사회적 가족법이 법제화된 후 함께 살아가기 시작한다. 화정, 대진, 미영은 같이 살며, 순미는 그 집에 종종 놀러온다. 그들은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유림의 부고 소식을 전달받는다. 모두 깊이 슬퍼하고 비통해하며 유림을 기린다.
그러나 유림의 장례식 이후, 유림의 재산 상속에 대한 판이 깔리기 시작한다. 유림의 재산에 대해 들은 여자들은 처음에는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조금씩 각자의 욕망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대진은 유림과 이전부터 살아 더 많은 몫을 가져가야겠다고 하고, 미영은 유림에게 밥을 차려주었으니 더 많은 몫을 가져가야겠다고 하고, 화정은 사실 유림의 애인이었다는 고백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종종 놀러오는 순미는 제 몫도 조금 챙겨주지 않겠냐는 은근한 눈길을 보낸다.
서로 자신의 욕망을 가감없이 어필하다 결국 해산한다. 그리고 각자의 꿈에 유림이 찾아온다. 그리고 깨자마자 모두 소리친다. 나 자신은 유림에게 선택받았다고.
모두 상속의 달콤한 착각에 빠져있었을 때, 갑자기 죽었던 은희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하나를 갖고 둘을 갖지 못하는 것을 남 탓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다 함께 살 수 있다'. 유림에게 계시받았다고 착각하던 여자들은 은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은희의 뒤따라오는 말은 '내 딸에게도 조금 주어라'.
은희의 말을 듣고 다음 날, 모두 여느 때처럼 집에 모여 다같이 밥을 먹는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며 평소와 같은 나날들을 보낸다. 서로의 목소리가 점차 섞여들어갈 때, 그렇게 막은 내려간다.
재산 분할은 현실적으로 굉장히 예민한 문제겠지만, 극에서는 매우 재치있게 풀어나간다. 거대한 상속에 대해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흘러나오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몫을 점점 강하게 어필하는 장면, 화정과 유림의 갑작스런 교제 사실 오픈 장면, 유림이 꿈에 나와 자신에게만 계시했다는 장면 등등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재미있고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모습이 마치 제목과 맞닿아있다고 느꼈다. 히스테리하고 불안하지만, 결국엔 춤추며 함께 살아가게 될 할머니들의 모습 말이다.
히스테리하고 불안하지만 춤추며 살아갈 2막의 나
2막이 어쩐지 즐거웠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미디어에서 보이는 틀에 박힌 할머니의 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는 퉁퉁 불은 손으로 나를 위해 칼국수를 해 주던...'과 같은 애절한 이미지화가 아니라, 할머니가 되었어도 자신의 욕망(여기서는 재산)에 대하여 갈구한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는 이런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세월의 흐름은 삶의 형태를 바꿔놓겠지만, 무엇이든 원한다는 나의 불타는 욕망이 할머니가 되어서도 꺼지지 않았으면 했다. 한때 난 '힙합하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기도 했기 때문에.
히스테리란, 정신 신경증의 한 유형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정신적 원인으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병적인 흥분 상태를 통틀어 이르는 말'으로 정의되어있다. 이러한 히스테리는 고대 이집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병이라고 불리었다. 여성의 자궁 안에서 발생하는 바이러스기에 잠재우기 위해서는 남성이 필요했고, 이를 합법적으로 행하기 위해 결혼이 필요했다. 사랑하지 않아도 히스테리라는 여성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오늘날, 히스테리는 재정의되었다. 여성의 자궁에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신경증의 한 형태로.
현대사회에서 히스테리와 불안은 삶의 동반자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된 순간에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든 어느 날 문득 찾아온다. 그렇다면 '히스테리 앤드 앵자이어티'는 칭호라고 치자. 잠깐, '나'는 쭉 '나'인데 할머니라고 달라질 것이 있을까? 그럼 할머니도 칭호라 하자. 히스테리하고 앵자이어티하지만 춤추는 할머니는 결국 그냥 '나'인 것이다. 딱히 대단한, 할머니가 멋있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박수칠 만한 것도 아닌 평범한 하나의 칭호이다. 게임 속에서 튜토리얼을 깨면 주는 초보자 타이틀과 같은 칭호.
칭호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이미지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평범하게 히스테리하고 불안한 '나'로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 시간이 들면 그 칭호가 할머니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그때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다. 내가 불쌍해 보이냐고. 그리고 이렇게 답해주길 바랄 것이다. 무척이나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일단은, 1막을 열심히 살아가고. 2막은 30년 후에나 시작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