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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가족이란 영원히 익어가는 존재다 - 고당도 [영화]

권용재의 〈고당도〉를 보고 죽음의 쓴맛을 핥고 난 뒤에야 남는, 아주 미약한 단맛에 대하여

by 최은파 에디터
2025.11.2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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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도(High Brix)’. 과일 상자에나 적혀 있을 법한 이 단어가 영화 제목이라니, 묘하게 이질적이다. 부고(訃告)의 ‘고(故)’가 먼저 떠오르는 탓일까, 이어지는 ‘당(糖)’은 낯설다 못해 서늘하다. 마치 죽음을 둘러싼 관계의 쓴맛 끝에서야 아주 조금 남겨지는 단맛, 혹은 죽음조차 하나의 상품으로 반죽해 꿀처럼 포장하려는 자본주의의 서글픈 농담처럼 들린다.


권용재 감독은 이 단어를 통해 가족이 함께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뒤집는다. 전작 〈굿바이! 굿마미〉에서 보여주었듯, 그는 늘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감정-슬픔, 민망함, 비루함-의 틈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위트를 길어 올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삶의 가장 날카로운 모서리 근처에서 기묘한 유머를 포착해내는 그의 감각은 이번 첫 장편에서도 유효하다. 아니, 더 능글맞고 뻔뻔해졌다.


이 영화는 그 ‘고당도’의 단맛을 찾기 위해, 먼저 철저하게 낮고 축축한 감정의 바닥까지 관객을 데려간다.

 

 

 

의대 등록금이 쏘아 올린 ‘가짜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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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선영(강말금)은 오랫동안 뇌사 상태인 아버지와 가족의 생계를 홀로 떠안아온 인물이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뒤, 남은 가족은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처지다. 그때, 사채업자에게 쫓기던 남동생 일회(봉태규)가 기상천외한 제안을 던진다. 조카의 의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의 부의금을 미리 당겨 받자는 것.


“가짜 장례식을 하자.”


아내 효연의 실수로 부고 문자가 발송되면서, 그들은 얼떨결에 이 미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위로금과 부조금을 받기 위해 죽음조차 상품화하는 일종의 ‘가족 비즈니스’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가짜 장례식이 진행될수록 거짓말이 불러오는 파열음은 커져만 가고, 결국 이 우스꽝스러운 쇼는 가족 각자가 억눌러온 진짜 애도와 결핍을 마주하게 만드는 촉매가 된다.

 

 

 

인물 소개: 떫은맛을 견디는 배우들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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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 (강말금)

삶의 무게에 절여진, 그러나 무너지지 않는 영화의 정서는 배우 강말금의 건조하고도 단단한 얼굴 위에 가장 오래 머문다. 그녀는 늘 지켜야 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가족 내 ‘평형추’ 역할을 한다. 동생 일회와의 갈등, 부모의 부재, 그리고 동호에 대한 기대 사이에서 감정적 중심을 잡는 인물이다.

 

동생의 황당한 아이디어에 기가 차 하면서도, 결국 공범이 되어 상주 완장을 차는 그녀의 모습은 책임감과 체념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K-장녀의 전형이다. 그녀의 피로한 눈빛은 이 소동극에 현실적인 무게감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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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 (봉태규)

철없지만 미워할 수 없는 불안의 얼굴 봉태규가 연기한 일회는 겉으로는 허술하고 가볍다. 이름부터 일회성 인생, 일회성 인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의 코믹함은 실은 불안과 결핍의 뒤집힌 얼굴에 가깝다. 그가 장례식을 통해서라도 가족을 한 공간에 모으려 했던 건,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리하고 비상식적인 방식으로라도 가족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그의 몸부림은 관객에게 쓴웃음을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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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연 (장리우)

파국을 앞당긴, 가장 현실적인 생활인 효연은 이 기묘한 소동극의 실질적인 방아쇠다. 남편 일회가 머뭇거릴 때, (실수였든 고의였든) 결정적인 순간 부고 문자를 발송해버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능한 남편을 타박하면서도, 빚쟁이에게 쫓기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기꺼이 공범이 된다. 효연은 아들의 의대 등록금을 위해서 모든 일을 껴안는다. 우리 시대 어머니를 대변한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은 이 범죄가 악의가 아닌, 절박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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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 (정순범)

무능한 아버지를 경멸하며 가족을 묶는 아이러니 신예 정순범이 연기한 동호는 이 가족의 가장 서늘한 지점을 담당한다. 그는 아버지 일회의 무능함과 비굴함을 누구보다 혐오한다. 그가 짊어진 ‘미래’는 사랑과 희망의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결국 현실에서는 ‘돈’으로 환원된다. 영화는 그 냉혹한 환산 과정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가난과 무능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은 그의 욕망은 역설적으로 흩어져 있던 가족들을 장례식장이라는 한 공간에 불러 모으는 강력한 자력이 된다. 어른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냉소적인 눈빛은, 이 콩가루 가족이 비로소 서로를 똑바로 마주 보게 만드는 구심점이 된다.


조연들

시사회를 보면서 가장 따뜻해진 순간이었다. 주연 배우들의 인사 후에 관객석에 앉아 있던 배우분들이 나와 인사를 나눴다. 영화를 보면서 그분들을 찾는 재미도 있었다. 어쩌면 영화 〈고당도〉를 가장 깊은 당도로 만들어준 장본인들이 아닐까.

 

이들은 죽음마저 거래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보인다. 장례식장을 채우는 조문객들은 이 사회가 죽음마저 거래와 예의의 영역으로 끌어다 쓰는 풍경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영화와 비슷하게 현실에서도 한 사람의 죽음보다 줄 돈과 받을 돈이 더 중요한 사람들. 이들의 익명성과 과장된 행동은 영화의 블랙 코미디적 톤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죽음조차 꿀처럼 포장해야 하는 시대의 아이러니


 

1. 가짜 장례식, 애도하지 못한 것들의 은유 - 그들이 장례식을 연기(Acting)한다는 설정은 단순한 코미디 장치가 아니다. 실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어떤 관계-말하지 못한 원망, 사라진 기대, 책임의 불균형-를 뒤늦게라도 애도하기 위한 일종의 대타 퍼포먼스다. 진짜 장례식에서는 차마 할 수 없었던 통곡과 분노가, 가짜 장례식이라는 무대 위에서 비로소 터져 나오는 아이러니가 관객의 마음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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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웃음은 가장 슬픈 방어기제 - 권용재 감독 특유의 유머는 상황을 가볍게 하려는 농담이 아니라, 삶의 처절함을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다. 사채 빚과 병원비, 그리고 등록금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현실의 압박 속에서, 인물들이 뱉어내는 농담은 비명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가 웃는 순간조차 뒷맛은 개운치 않고 미묘하게 씁쓸하다.


3. ‘고당도’라는 단맛은 결코 달지 않다 - 영화가 말하는 단맛은 판타지 같은 희망이나 화해가 아니다. 모든 소동이 끝나고 체념 끝에서야 찾아오는 온도의 회복에 가깝다. 가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상처는 여전히 쓰리다. 그럼에도 서로의 떫은맛을 확인하고 조금은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거리, 딱 그만큼의 농도가 바로 이 영화의 ‘고당도’다.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애도한 적이 있는가


 

영화 〈고당도〉는 거창한 서사보다는 작고 오래된 감정의 침전물을 긁어 올리는 영화다. 의대 등록금 때문에 장례식을 치른다는 막장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감독이 파헤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 서로에게 남기는 감정적 부채다.


극장을 나서며 관객은 묘한 피로감과 함께 아주 작은 미련을 품게 된다. 우린 정말 제대로 이별하고 있는가? 형식적인 부조금 봉투 속에 진짜 마음을 숨긴 채, 서로를 온전히 애도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고당도〉의 단맛은 그래서 혀가 아니라 가슴에 남는다. 달콤함이 아니라 씁쓸함과 떫음을 견디고 난 뒤에야 겨우 손가락 끝에 스치는 미약한 당도. 그 서늘한 위로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관객의 마음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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