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예술은 죽었다>는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저자는 어떠한 이유로 예술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일지에 대한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예술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고, 예술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 뿐만 아니라 예술을 향유하는 이들 또한 많아지고 있다. 아트인사이트를 비롯한 문화예술 플랫폼들 또한 활발히 운영되고 있기에 ‘예술이 죽었다’는 극단적인 표현은 나에게 잘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모두 읽고 난 뒤, 저자가 주장하는 ‘예술의 죽음’이 옳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자 박원재는 책 속에서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예술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 일상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움직여야 할 예술이, 소수의 예술이 되어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예술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예술의 죽음에 일부 일조한 셈이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면,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해설을 읽고 그 해설을 작품에 끼워 맞추려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작가의 삶과 관객의 삶을 별개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예술이란 우리의 삶에 들어와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움직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예술의 역할’에 대해 알아야 한다. 예술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고,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책 속에 소개되었던 작품 중 하나를 예시로 들고 오고 싶다. 미국의 흑인 여성 작가인 캐리 메이 웜스의 <키친 테이블 시리즈>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가 경험한 구조적 불평등을 설치물 등을 이용하여 예술로 표현해 내는 작가다. 이 작품은 단순하게 ‘개인’의 삶을 나타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삶을 관객들 모두에게 보여준다. 관객들에게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고, 감각하게 하여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
[“예술은 인류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공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가장 강력한 플랫폼이다.”] (26p)
너무나도 다양한 인종, 국가, 문화... 그 사이에서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갈라지고 나눠질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문학, 미술, 음악 등의 예술은 우리가 상대를 이해하기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같은 감정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길을 터 준다. 비유하자면, 서로 다른 100명의 사람들이 모인 파티가 있다 치면 그곳에서 100명 전부와 친분이 있는 한 사람이 예술인 셈이다.
이처럼 우리는 예술이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삶을 감각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예술은 소수의 특권층 혹은 소수의 천재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상과 삶을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전달책이다. 우리가 예술이 모두의 것임을 알고 함께 예술이 던지는 질문에 답할 때, 그때야 말로 예술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단일한 기준이나 소수의 승인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 그것은 삶의 모든 층위의 내면, 공동체의 경험, 문화적 차이ㅡ를 반영하며 그 다채로움 속에서 힘을 얻는다. ... 우리가 예술을 다시 이유와 소통의 장으로 되돌리려면, 소수의 도장이 아니라 모두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다양성을 품은 예술만이 삶을 함께 고민하고 서로 다른 우리를 연결하는 여정이 될 수 있다.”] (7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