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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결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가고,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는 시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지독한 외로움 속에 살아간다. 수백 수천 명의 관계망 속에 둘러싸여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서 진짜 나를 알아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서늘한 공허함.
차가운 빌딩 숲과 소음으로 가득 찬 도심 한복판에서 스스로를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섬'이라 느끼며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영화 <김씨표류기>는 나지막이 고백한다.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사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고독이라는 외딴섬에 표류하고 있다고 말이다.
서울 한복판, 각자의 섬에 갇힌 사람들
남자 김씨(정재영 배우)는 연인과의 이별과 막대한 빚이라는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강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죽음이 아닌, 도심 속 무인도 '밤섬'에서의 표류였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와 화려한 고층 빌딩이 눈앞에 보이지만, 그 누구도 그를 보지 못한다. 가깝지만 닿을 수 없는 완벽한 고립. 그러나 그는 섬에 혼자 존재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며 느껴야 했던 '군중 속의 고독'이 더 지독했음을 깨달아간다.
반면, 여자 김씨(정려원 배우)는 스스로 만든 단절의 섬에 갇혀 산다. 온라인에서 타인의 사진으로 꾸며낸 가짜 삶을 살며 자기 자신을 지워버린다.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렌즈 너머 고요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밤하늘의 달과 민방위 훈련 날의 서울을 관찰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아무도 없어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인물은 물리적·심리적으로 각자의 단절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표류 중 발견한 삶의 '희망'
두 사람을 처음 연결한 고리는 여자 김씨의 카메라 렌즈였다.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 갇혀 살던 그녀의 카메라에 밤섬이라는 무인도에서 홀로 버텨내는 남자 김씨가 우연히 들어온다.
어느 날 여자 김씨는 망원경 너머로 남자 김씨가 간절한 눈빛으로 버려진 '짜파게티 봉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 단 하나의 음식을 그토록 열망하는 그를 도우려는 순수한 마음에, 그녀는 수년 만에 용기를 내어 배달원에게 부탁해 밤섬으로 직접 짜장면을 보내준다. 하지만 남자 김씨는 이를 거절하고 돌려보낸다. 그에게 직접 옥수수를 씨뿌려 키우고, 면을 만들어 먹는 과정은 '나도 스스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살아갈 이유이자 희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결국 땀 흘려 옥수수를 재배하고 기어코 면을 뽑아내 눈물젖은 짜장면을 만들어 먹어치우는 그의 의지는, 여자 김씨의 닫힌 세계를 깊게 뒤흔든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뚫고, 그녀는 어두운 밤 헬멧으로 자신을 숨긴 채 홀로 한강대교로 향한다. 그리고 밤섬을 향해 마음을 담은 유리병 편지를 온 힘껏 던진다. 남자 김씨가 스스로 일궈낸 희망이 닫혀 있던 그녀의 문을 열고, 마침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게 만든 것이다.
HELP to HELLO, 타자에서 '우리'로
사실 두 사람의 은밀한 소통은 밤섬에 고립된 남자 김씨가 모래 위에 새겨둔 ‘HELP’라는 글자에서 시작된다. 이를 발견한 여자 김씨는 그의 말에 응답하듯, A4용지에 대문자 영어로 문장을 적어 유리병에 담아 보낸다. 한국어라는 익숙한 말을 두고 굳이 서툰 영어를 주고받는 이들의 교류는 역설적으로 사회의 굴레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둘만의 비밀스러운 언어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김씨가 공무원에게 발견돼 밤섬에서 쫓겨나자, 그는 이번에는 제대로 죽겠다는 마음으로 63빌딩을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자 김씨는 오직 그를 붙잡겠다는 일념으로 수년간 자신을 가둬두었던 방을 박차고 나와 환한 대낮의 거리로 뛰어든다. 가까스로 버스를 따라잡은 그녀는 마침내 그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진짜 이름을 고백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마음을 주고받았던 바로 그 언어로.
“My name is…”
우리가 매일같이 오르내리는 퍽퍽하고 익숙한 서울의 버스 한복판. 그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흘러나온 서툰 영어 한마디는 그래서 더욱 생경하고도 벅찬 울림을 남긴다. 세상에는 끝내 닿지 못했던 두 사람이 둘만의 언어로 서로에게만은 닿은 순간. 두 사람은 각자의 고립된 세계 밖으로 탈출한다.
서로의 섬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섬에 살며 외로움을 견뎌낸다. 타인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번잡한 일상 속에서도, 불쑥 나 혼자만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차가운 공허를 피할 수는 없다.
영화 <김씨표류기>가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는 어쩌면 한 사람을 고립에서 건져내기 위해 이 거대한 도시의 수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친 신호를 알아봐 주고, 기꺼이 자신의 마음으로 응답해 주는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수백만 명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울 수 있지만, 단 한 사람과 마음이 닿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완전히 혼자가 아니다.
남자 김씨가 모래 위에 남긴 ‘HELP’가 여자 김씨에게 닿는 ‘HELLO’라는 인사로 이어졌듯, 깊은 고독 속에서도 나의 신호를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향해 헤엄쳐 나갈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